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397] 채수시조(債帥市曹)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 의종(懿宗) 때 노암(路巖)이 정권을 농단하며 뇌물을 많이 받아먹었다. 진반수(陳蟠叟)가 상소를 올렸다. 변함(邊咸) 한 집안의 재산만 몰수해도 나라의 군대를 2년은 먹일 수 있다고 썼다. 황제가 변함이 대체 누구냐고 묻자, 노암의 하인이라고 말했다. 황제가 격분해서 진반수를 귀양 보냈다. 그 뒤로 아무도 직언을 올리지 않았다. 당 고종(高宗) 때 이의부(李義府)는 처자까지 나서서 관직을 팔고 돈으로 송사를 멋대로 조종해 문 앞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장수가 되려는 자들은 내관에게 뇌물을 안겨 청탁을 했다. 부자에게 돈을 빌려 관직에 오른 뒤 백성의 고혈을 빨아 배로 갚았다. 그래서 당시의 장수를 채수(債帥), 즉 빚을 내서 된 장수라 불렀다. 위(魏)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

[정민의 世說新語] [396] 폐목강심(閉目降心)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소동파가 '병중에 조탑원을 노닐다(病中遊祖塔院)'라는 시의 5·6구에서 "병 때문에 한가함 얻어 나쁘지만 않으니, 마음 편한 게 약이지 다른 처방 없다네(因病得閑殊不惡, 安心是藥更無方)"라고 했다. 몸 아픈 것은 안 좋지만 그로 인해 내면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으니 나쁘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선종(禪宗)의 안심법문(安心法門)에서 나왔다. 혜가(慧可)가 달마(達磨)에게 물었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가라앉혀 주십시오." 달마가 말했다. "그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편안하게 해주마." 혜가가 궁리하다가 말했다. "찾아보았지만 못 찾겠습니다." "그럼 됐구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온다. 조선시대 이의태(李宜泰)는 남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 잇달아 상(喪)을 만..

[정민의 世說新語] [395] 비조시석(非朝是夕)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813년 8월 늦장마 속에 다산은 제자들에게 주는 당부의 글을 썼다. 사람들이 진일도인(眞一道人)을 찾아와 화복을 물었다. 그의 대답이 이랬다. "다만 일등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얼마 못 가 꺾이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아침이 아니면 저녁일 것이니, 굳이 애써서 점칠 것이 없다(但道第一人, 須知不久折. 非朝卽是夕, 蓍策何勞揲)." 말뜻은 이렇다. 비싼 돈 들여가며 점을 치고, 무당을 불러 굿할 것 없다. 정답은 얼마 못 간다는 것뿐이다. 오래 머물 궁리를 버리고 내려설 준비를 해라. 천년만년 누리려다 나락에 떨어져서는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원망하니 슬프고 딱하다. 다산 정약용. /조선일보 DB 다산은 또 이렇게 썼다. "즐거움은 비방의 빌미가 되고 괴로움은 기..

[정민의 世說新語] [394] 만이불생 (滿而不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규보(李奎報)가 술통에 새긴 '준명(樽銘)'은 이렇다. "너는 쌓아둔 것을 옮겨, 사람의 배 속에 넣는다. 너는 가득 차면 능히 덜어내므로 넘치는 법이 없다. 사람은 가득 차도 덜어내지 않으니 쉬 엎어지고 만다(移爾所蓄, 納人之腹. 汝盈而能損故不溢, 人滿而不省故易仆)." 글 속의 불생(不省)이란 말 때문에 반성을 거부하는 태도의 만연을 따끔하게 찌른 김수영의 시 '절망'이 생각났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

[정민의 世說新語] [393] 부승치구(負乘致寇)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주역 '해괘(解卦)'에 '짐을 등에 지고 수레에 타니 도적을 불러들인다(負且乘, 致寇至)'는 말이 있다. 공영달(孔穎達)의 풀이는 이렇다. "수레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는 것이다. 등에 짐을 지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사람에게 이를 적용하면, 수레 위에 있으면서 물건을 등에 진 것이다. 그래서 도둑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을 알아서 마침내 이를 빼앗고자 한다." 짐을 진 천한 자가 높은 사람이 타는 수레 위에 올라앉았다. 도둑이 보고 등에 진 것이 남의 재물을 훔친 것임을 알아 강도로 돌변해 이를 빼앗는다는 말이다. 부승치구(負乘致寇)는 깜냥이 못되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재앙을 자초하는 일의 비유로 자주 쓰는 말이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의 '부차승(負且乘)'에서 이를 ..

[정민의 世說新語] [392] 유민가외(唯民可畏) |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나라 명종(明宗) 때 강징(康澄)이 시사(時事)로 상소하여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 다섯 가지요, 깊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이 질서를 잃고, 천상(天象)에 변화가 생기며, 소인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산이 무너지고 하천이 마르며, 홍수와 가뭄이나 병충해 같은 다섯 가지의 일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어진 선비가 몸을 감추어 숨고, 염치가 무너지고 도리가 사라지며, 상하가 서로 사적인 이익만 따르고, 비방과 칭찬이 진실을 어지럽히며, 바른말을 해도 듣지 않는 여섯 가지의 일만은 깊이 두려워할 만합니다(爲國家者, 有不足懼者五, 深可畏者六. 三辰失行, 不足懼. 天象變見, 不足懼. 小人訛言, 不足懼. ..

[정민의 世說新語] [391] 연서조저(燃犀照渚)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김종직(金宗直)의 '술회(述懷)' 시를 읽는다. "인사고과 핵심은 전형에 달렸으니, 어진 이가 어이해 안팎 천거 혐의하랴. 열에 다섯 얻는대도 나라 보답 충분커늘, 임금이 귀히 여김 어이해 헤아리랴. 열 손가락 가리킴을 삼가지 아니하면, 남이 다시 물소 뿔 태워 우저 물가 비추리라. 천군은 지엄하고 여론은 공변되니, 대오가 입 다물고 말 없다고 하지 마소(庶績之凝在銓敍, 哲人何嫌內外擧. 拔十得五足報國, 寧用計校王玉女. 十手所指苟不愼, 人更燃犀照牛渚. 天君有嚴輿論公, 莫謂臺烏噤無語)." 시 속에 고사가 많다. 조정의 인재 선발은 전형을 잘해 적임자를 서용하는 데 달렸다. 춘추시대 대부 기해(祁奚)가 늙어 사직하며 원수 해호(解狐)를 천거했다가 그가 죽자 아들 오(午)를 천거한 일..

[정민의 世說新語] [390] 원굴옹알(冤屈壅閼)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성종 때 총애하는 내시가 근친(覲親)하러 고향 집에 갔다. 지나는 고을마다 수령들이 그에게 후하게 대접하며 아첨했다. 고향 고을의 사또는 환관의 왕래에 사사로이 친교를 맺을 수 없다며 의례적 문안에 그쳤다. 환관이 앙심을 품고, 임금에게 그가 특별히 훌륭한 대접을 해주더라고 거짓으로 고했다. 임금이 그를 비루하게 여겨 이후 그의 벼슬길이 꽉 막혔다. 어느 날 경연 자리에서 임금이 그 수령이 내관에게 아첨한 일을 예로 들며 신하를 경계했다. 대신이 물러나 실상을 탐지해 사실대로 아뢰자 임금이 당장 내관의 목을 베게 했다. 윤기(尹愭, 1741~1826)의 '정상한화(井上閒話)'에 나온다. 엘리자베스 케이스가 그린 조선시대 내시. /조선일보 DB 내시는 충직한 신하를 사실과 정반대..

[정민의 世說新語] [389] 숙살수렴(肅殺收斂)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말했다.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것은 서리다. 시들어 죽게 하는 것은 거두어들이려는 것이다. 사물이 어찌 언제나 왕성할 수만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초목에만 서리가 있지 않고 사람에게도 있다. 전염병은 일반 백성에게 내리는 서리다. 옥사로 국문하는 것은 사대부의 서리다. 흉년은 나라 절반에 해당하는 서리이고, 전쟁은 온 나라에 내린 서리다. 사람에게 서리가 있음은 거두어들이려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늘이 경고하여 위엄을 보이는 것인데, 교만하고 방종한 자는 이를 재촉한다(草木之肅殺者, 霜也. 然肅殺所以收斂也. 物豈能長旺哉. 故非惟草木之有霜, 人亦有之. 癘疫編氓之霜也, 鞫獄搢紳之霜也, 凶荒半國之霜也, 兵燹擧國之霜也...

[정민의 世說新語] [388] 영상조파(影上爪爬)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 한 단락을 소개한다. "지극한 사람은 헐뜯음과 기림에 대처할 때 사실과 거짓에 관계없이 모두 배불러하지도 않고 목말라하지도 않으며, 가려워하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는다. 보통 사람은 진짜로 하는 칭찬과 진짜로 하는 비방에도 잘 대처하지 못한다. 그러니 근거 없이 해대는 칭찬이나 잘못이 없는데 퍼붓는 비방에 있어서이겠는가? 사실이 아닌데 받는 칭찬은 꿈속에 밥을 더 먹는 것이나, 그림자를 손톱으로 긁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잘못이 없는데 받는 비방은 꿈속에 목마른 것이나, 그림자 위에 몽둥이로 맞는 것과 한가지다. 어리석은 사람은 다만 꿈에서 밥을 더 먹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강퍅한 인간은 그림자를 몽둥이로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