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347] 처정불고 (處靜不枯)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명나라 도륭(屠隆)의 '명료자유(冥寥子游)'는 관리로 있으면서 세상살이 눈치 보기에 지친 명료자가 상상 속 유람을 떠나는 이야기다. 그는 익정지담(匿情之談)과 부전지례(不典之禮)의 허울뿐인 인간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토로하며 글을 시작한다. 익정지담은 정을 숨긴, 즉 속내를 감추고 겉꾸며 하는 대화다. 그 설명은 이렇다. "주인과 손님이 큰절로 인사하고 날씨와 안부를 묻는 외에는 한마디도 더하지 않는다. 이제껏 잠깐의 인연이 없던 사람과도 한번 보고는 악수하고 걸핏하면 진심을 일컫다가 손을 흔들고 헤어지자 원수처럼 흘겨본다. 면전에서 성대한 덕을 칭송할 때는 백이(伯夷)가 따로 없더니 발꿈치를 돌리기도 전에 등지는 말을 하자 흉악한 도적인 도척(盜蹠)과 한가지다." 부전지례, ..

[정민의 世說新語] [346] 독서칠결(讀書七訣)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독서칠결(讀書七訣)'은 성문준(成文濬·1559~1626)이 신량(申湸)을 위해 써준 글이다. 독서에서 유념해야 할 7가지를 들어 경전 공부에 임하는 자세를 말했다. 서문을 보면 13세 소년은 워낙 재주가 뛰어났다. 하지만 책을 읽어 가늠하는 저울질의 역량은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문선(文選)'을 읽는데 어디서부터 들어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첫째, 한 권당 1~2년씩 집중하여 수백 번씩 줄줄 외울 때까지 읽는다. 다 외운 책은 불에 태워 없애 버릴 각오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옆구리를 찔러도 막힘없이 나온다. 둘째, 건너뛰는 법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읽어야 한다. 어렵다고 건너뛰고 막힌다고 멈추면 성취는 없다. 셋째, 감정을 이입해서 몰입해야 한다...

[정민의 世說新語] [345] 비대목소(鼻大目小)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우우(周羽周羽)라는 새는 머리가 무겁고 꽁지는 굽어 있다. 냇가에서 물을 마시려 고개를 숙이면 무게를 못 이겨 앞으로 고꾸라진다. 다른 놈이 뒤에서 그 꽁지를 물어주어야 물을 마신다. '한비자(韓非子)' '설림(說林)' 하(下)에 나온다. 다음 말이 덧붙어 있다. "사람도 제힘으로 마시기 힘든 사람은 그 깃털을 물어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人之所有飮不足者, 不可不索其羽也)." 백락(伯樂)은 말 감별에 능했다. 척 보고 천리마를 알아보았다. 미워하는 자가 말에 대해 물으면 천리마 감별법을 가르쳐주었다. 아끼는 자에게는 노둔한 말을 구별하는 법을 일러주었다. 일생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한 천리마 감별법은 알아봤자 써먹을 기회가 거의 없다. 노둔한 말은 날마다 거래되는지라 간단한 요..

[정민의 世說新語] [344] 감인세계(堪忍世界)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흠영(欽英)' 중 1784년 2월 5일의 일기에서 썼다. "우리는 감인세계(堪忍世界)에 태어났다. 참고 견뎌야 할 일이 열에 여덟아홉이다. 참아 견디며 살다가 참고 견디다 죽으니 평생이 온통 이렇다. 불교에는 출세간(出世間) 즉 세간을 벗어나는 법이 있다. 이는 감인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벗어난다 함은 세계를 이탈하여 별도의 땅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일이 모두 허무함을 깨닫는 것이다.(我輩旣生於堪忍世界, 則堪忍之事, 十恒八九. 生於堪忍, 死於堪忍, 一世盡是也. 西敎有出世間法. 是法指出了堪忍世界之謂也. 所云出者, 非離去世界, 另赴別地. 止是悟得一切等之虛空也.)" 감인(堪忍)은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못 견딜 일도 묵..

[정민의 世說新語] [343] 기심화심(機深禍深)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청나라 때 왕지부(王之鈇)가 호남 지역 산중 농가의 벽 위에 적혀 있었다는 시 네 수를 자신이 엮은 '언행휘찬(言行彙纂)'에 실어놓았다. 주희(朱熹)의 시라고도 하는데 지은이는 분명치 않다. 첫째 수. "까치 짖음 기뻐할 일이 못 되고, 까마귀 운다 한들 어이 흉할까. 인간 세상 흉하고 길한 일들은, 새 울음소리 속에 있지 않다네.(鵲噪非爲喜, 鴉鳴豈是凶. 人間凶與吉, 不在鳥聲中.)" 까치가 아침부터 우짖으니 기쁜 소식이 오려나 싶어 설렌다. 까마귀가 깍깍 울면 왠지 불길한 일이 닥칠 것만 같아 불안하다. 새 울음소리 하나에 마음이 그만 이랬다저랬다 한다. 둘째 수. "밭 가는 소 저 먹을 풀이 없는데, 창고 쥐는 남아도는 양식이 있네. 온갖 일 분수가 정해있건만, 뜬 인생이 ..

[정민의 世說新語] [342] 군아쟁병 (群兒爭餠)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몽인(柳夢寅·1559~1623)은 성품이 각지고 앙칼졌다. 불의를 참지 못했다. 광해의 폐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1621년 월사 이정귀(李廷龜·1564~1635)가 마침 자리가 빈 태학사(太學士) 자리에 유몽인을 추천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유몽인이 즉각 월사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해 기근이 들었을 때 아이들이 떡을 두고 다투길래 가서 살펴보니 콧물이 미끈거립디다. 몽인은 강호에 살면서 한가하여 아무 일이 없습니다. 지난해에는 '춘추좌씨전'을 읽고, 올해는 두보의 시를 외우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노년의 벗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여생을 보내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과 콧물 묻은 떡을 다투는 일 같은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올시다(去歲年饑, 羣兒爭餠, 而歸察之, 鼻液糊矣. ..

[정민의 世說新語] [341] 소림황엽 (疎林黃葉)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비 묻은 바람이 지나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허물어지듯 땅 위로 쏟아진다. 길 위에 노란 카펫이 깔리고 길가에 선 차도 온통 노란 잎에 덮였다. 좀체 속내를 보이지 않던 나무 사이가 휑하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의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김하라씨가 유만주(兪晩柱·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을 엮어 옮긴 "일기를 쓰다"(돌베개)를 읽었다. 그중 낙엽에 대해 말한 1785년 9월 19일 일기의 한 대목이다. "안개는 자욱하고 구름은 어두운데 누런 잎이 어지러이 진다. 가랑비에 바람이 빗겨 불자 푸른 못에 잔물결이 인다. 계절의 사물은 쓸쓸해도 생각만은 번화하다(烟沉雲晦, 黃葉亂下. 雨細風斜, 碧沼微瀾. 時物蕭條, 意想繁華)." 눈앞의 풍광은 쓸쓸한데 마음속 생각은 번화..

[정민의 世說新語] [340] 세사상반 (世事相反)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명나라 사조제(謝肇淛·1567~1624)의 "문해피사(文海披沙)"에 보니 '세사상반(世事相反)'의 조목이 나온다. 세상일 중 상식과 반대로 된 경우를 나열한 내용이다. 떠오르는 풍경이 많아 여기에 소개한다. "지위가 높은 관리는 천하일을 근심하지 않는데 초야의 사람이 도리어 근심한다. 문관은 군대 일을 자주 말하나 무관은 싸우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은 문장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학문도 없는 인간이 주로 떠든다. 부자는 돈 쓰기를 즐기지 않지만 가난한 이는 돈을 잘도 쓴다. 승려와 도사가 비린 음식을 즐겨 먹고 보통 사람이 도리어 채식을 한다. 관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권세가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많은데 낮은 지방관은 도리어 군현을 장악하고 있다. 벼슬이 ..

[정민의 世說新語] [339] 단사절영 (斷思絶營)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에도 시대의 유학자 장야풍산(長野豊山·1783~1837)이 쓴 '송음쾌담(松陰快談)'에 이런 대목이 있다. "'징비록' 2권은 조선 유성룡이 지은 것이다. 문록(文祿) 연간 삼한과의 전쟁(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자못 자세하다. 내가 '무비지(武備志)'를 읽어보니 '조선의 유승총(柳承寵)과 이덕형(李德馨)이 모두 그 국왕 이연(李昖·선조)을 현혹해 마침내 국정을 어지럽게 만들었다'고 적어 놓았다. 유승총은 바로 유성룡인데 글자가 서로 비슷해서 잘못된 것이지 싶다. 막상 '징비록'을 보니 유성룡과 이덕형은 모두 그 나라에 공이 있다. '무비지'에서 이러쿵저러쿵 한 것은 내 생각에 분명히 모두 거짓말인 듯하나 이제 와 상고할 수가 없다." 명나라 모원의(茅元儀·1594~1640)가..

[정민의 世說新語] [338] 일자문결 (一字文訣)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독서보(讀書譜)"에 왕구산(王緱山)이 쓴 '일자결(一字訣)'이 실려 있다. "문장에 딱 한 글자로 말할 만한 비결이 있을까? '긴(緊)'이 그것이다. 긴이란 장(丈)을 줄여 척(尺)으로 만들고, 척을 쥐어짜 촌(寸)으로 만드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글이 꽉 짜여 빈틈이 없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옛 사람은 글의 포치(布置)는 느슨해도 결구(結構) 즉 짜임새는 촘촘했다. 지금 사람은 구성은 촘촘하나 짜임새는 엉성하다. 솜씨가 교묘한 자는 마치 준마가 시내를 단숨에 건너뛰는 것 같고, 재주가 못난 자는 노둔한 소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文章有一字訣乎? 曰緊. 緊非縮丈爲尺, 蹙尺爲寸之謂也. 謂文之接縫鬪筍處也. 古人布局寬, 結構緊. 今人布局緊, 結構寬. 巧者如駿馬跳澗, 拙者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