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241] 관저복통(官猪腹痛)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엽갑(柳葉甲)은 버들잎 모양의 쇠미늘을 잘게 꿰어 만든다. 한 곳이 망가지면 쉬 흐트러져 쓰기가 어려웠다. 인조 때 대신들이 청나라의 제도에 따라 갑옷을 고쳐 만들 것을 건의했다. 임금은 새 갑옷이 예전 것보다 갑절이나 낫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있는 것을 훼손해가며 개조할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국고의 낭비를 염려해서다. 방물로 납입되는 갑옷이 도무지 쓸모가 없으니 이 문제의 해결이 먼저라며 이렇게 말했다. "속담에 '관가 돼지가 배 앓는다(官猪腹痛)'고 했다. 누가 자주 기름을 칠하고 잘 보관해서 오래 사용하려 하겠는가?" 그러자 이시백이 자신도 이 갑옷을 하사받았는데 너무 무거워 입을 수가 없었다며 수긍했다. 예전 갑옷은 가볍고 보관이 용이해 가끔 기름칠만 해..

[정민의 世說新語] [240] 괄모귀배(刮毛龜背)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유감(有感)'이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처음엔 기린 뿔에 받혔나 싶더니만, 점차 거북 터럭 긁는 것과 비슷하네(初疑觸麟角, 漸似刮龜毛)." 무슨 말인가? 기린 뿔은 희귀해 학업상의 큰 성취를 비유해 쓴다. 위나라 장제(蔣濟)가 "배우는 사람은 쇠털 같은데, 이루는 사람은 기린 뿔 같네(學者如牛毛, 成者如麟角)"라 한 데서 나왔다. 거북 등딱지는 아무리 긁어봤자 터럭 한 올 못 구한다. 거북 털 운운한 것은 수고만 하고 거둘 보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처음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을 땐 자신이 넘쳤고 뭔가 세상을 위해 근사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여겼었다. 하지만 갈수록 거북 등을 긁어 터럭 구하는 일과 다름없게 되어 아..

[정민의 世說新語] [239] 기왕불구 (旣往不咎)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노나라 애공(哀公)이 사(社)에 대해 묻자 재아(宰我)가 대답했다. "하후씨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은 잣나무를 썼습니다. 주나라 사람은 밤나무를 썼는데, 백성을 전율(戰栗)케 하려는 뜻입니다." "논어" '팔일(八佾)'에 나온다. 나무의 종류가 바뀐 것은 토질 차이일 뿐 밤나무로 백성들을 겁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께서 이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뤄진 일이라 말하지 않고(成事不說), 끝난 일이라 충고하지 않는다(遂事不諫). 이미 지나간 일이어서 탓하지 않겠다(旣往不咎)." 기왕불구! 이미 지나간 일은 허물 삼지 않는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더 이상 말은 않겠지만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말씀이다. 묵인 아닌 깊은 책망의 뜻을 담았다. 성대중(成..

[정민의 世說新語] [232] 간저한송(澗底寒松)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진(晉)나라 때 좌사(左思)의 '영사(�史)' 제2수다. '울창한 시냇가 소나무, 빽빽한 산 위의 묘목. 저들의 한 치 되는 줄기 가지고, 백 척 소나무 가지를 덮네. 귀족들은 높은 지위 독차지하고, 인재는 낮은 지위 잠겨 있구나. 지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 유래가 하루아침 된 것 아닐세(鬱鬱澗底松 離離山上苗 以彼徑寸莖 蔭此百尺條 世胄�高位 英俊沈下僚 地勢使之然 由來非一朝).' 그는 '간저송(澗底松)'과 '산상묘(山上苗)'를 대비해 능력도 없이 가문의 위세를 업고 고위직을 독차지한 벌족(閥族)을 산꼭대기의 묘목에, 영특한 재주를 품고도 말단의 지위를 전전하는 인재를 냇가의 소나무에 견주었다. 이후로 간저한송(澗底寒松), 즉 냇가의 찬 솔은 덕과 재주가 높은데도 지위는 낮은 사..

[정민의 世說新語] [228] 난진방선(亂眞妨善)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위백규(魏伯珪·1727~1798)가 정원에 여러 종류의 국화를 길렀다. 그중 소주황(蘇州黃)이란 품종이 단연 무성했다. 빛깔도 노랗고 꽃술은 빽빽했다. 가지는 무성하고 잎사귀는 촘촘했다. 정원을 둘러보던 그가 갑자기 사람을 불러 소주황을 모두 뽑아 버리라고 했다. 곁에 있던 객이 어찌 저 고운 꽃을 미워하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이렇다. 빛깔과 모양이 좋은 국화의 품종과 비슷하고 피는 시절도 같다. 요염하고 조밀한 모습이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한다. 한번 심으면 거름을 안 줘도 무성하게 퍼진다. 나눠 심지 않아도 절로 덩굴져 뻗는다. 바위틈이나 담 모서리라도 뿌리를 교묘하게 내려 토양을 썩게 하고 담장을 망가뜨린다. 안 되겠다 싶어 뽑으려 들면 뿌리가 얼키설키 엉겨 제거가 아주..

[정민의 世說新語] [199] 조락공강 (潮落空江)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나라 때 이정(李�H)이 쓸쓸한 송강역(松江驛) 물가에서 저물녘에 배를 대다가 시 한 수를 썼다. "조각배에 외론 객이 늦도록 머뭇대니, 여뀌꽃이 피어 있는 수역(水驛)의 가을일세. 세월에 놀라다가 이별마저 다한 뒤, 안개 물결 머무느니 고금의 근심일래. 구름 낀 고향 땅엔 산천이 저무는데, 조수 진 텅 빈 강서 그물을 거두누나. 여기에 예쁜 아씨 옛 노래가 들려오니, 노 젓는 소리만이 채릉주(采菱舟)로 흩어진다(片帆孤客晩夷猶, 紅蓼花前水驛秋. 歲月方驚離別盡, 烟波仍駐古今愁. 雲陰故國山川暮, 潮落空江網��收. 還有吳娃舊歌曲, 棹聲遙散采菱舟). 참으로 적막하고 쓸쓸한 광경이다. 조각배를 탄 나그네가 물가를 쉬 떠나지 못하는 것은 강가의 붉은 여뀌꽃 때문만은 아니다. 둘러보니 지..

[정민의 世說新語] [190] 추연가슬 (墜淵加膝)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연암 박지원이 면천 군수 시절, 충청 감사가 연분(年分)의 등급을 낮게 해줄 것을 청하는 장계를 누차 올렸지만 번번이 가납되지 못했다. 다급해진 감사가 면천 군수의 글솜씨를 빌려 다시 장계를 올렸다. 연암이 지은 글이 올라가자 그 즉시 윤허가 떨어졌다. 감사는 연암을 청해 각별히 대접하고 은근한 뜻을 펴보였다. 하루는 감사가 연암에게 도내 수령의 고과 점수를 매기는 종이를 꺼내놓고 함께 논의할 것을 청했다. 채점을 받아야 할 당사자에게 채점을 같이 하자고 한 것이니, 감사로서는 특별한 후의를 보이려 한 일이었다. 민망해진 연암은 갑자기 아프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해 면천으로 돌아와 버렸다. 감사는 연암의 태도에 모욕감을 느꼈다. 나는 저에게 속마음을 주었건만, 제가 어찌 저리 도..

[정민의 世說新語] [187] 치모랍언 (梔貌蠟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시장에서 말 채찍을 파는 자가 있었다. 50전이면 충분할 물건을 5만전의 값으로 불렀다. 값을 낮춰 부르면 마구 성을 냈다. 지나가던 부자가 장사꾼의 말에 혹해 5만전에 선뜻 그 채찍을 샀다. 부자가 친구에게 새로 산 채찍 자랑을 했다. 살펴보니 특별할 것도 없고 성능도 시원찮은 하품이었다. "이런 것을 어찌 5만전이나 주고 샀소?" "이 황금빛과 자르르한 광택을 보시구려. 게다가 장사꾼의 말에 따르면 이 채찍은…." 그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친구는 하인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래서 그 채찍을 담갔다. 그러자 금세 비틀어지더니 황금빛도 희게 변해버렸다. 노란 빛깔은 치자 물을 들인 것이었고, 광택은 밀랍을 먹인 것이었다. 부자가 불쾌해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도 들인 돈이 아까..

[정민의 世說新語] [182] 지미무미(至味無味)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명한 냉면집을 안내하겠다 해서 갔더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맛을 보곤 실망했다. 좋게 말해 담백하고 그저 말해 밍밍했다. 네 맛도 내 맛도 없었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꼽는다는 냉면집 맛이 학교 앞 분식집만도 못했다. 나처럼 실망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집 벽에 순수한 재료로만 육수를 내서 처음 맛보면 이상해도 이것이 냉면 육수의 참맛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여러 해 전 일인데도 가끔 생각난다. 감미료로 맛을 낸 육수 국물에 길들여진 입맛들이 얼마나 투덜댔으면 주인이 그런 글을 써 붙일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사람들이 여전히 줄을 서서 찾는 걸 보면, 맛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세상 사는 맛은 진한 술과 식초 같지만, 지극한 맛은 맛이 ..

[정민의 世說新語] [180] 만이불일(滿而不溢)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조판서 이문원(李文源·1740~1794)의 세 아들이 가평에서 아버지를 뵈러 상경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말을 타고 온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냈다. "아직 젊은데 고작 100여리 걷는 것이 싫어 말을 타다니. 힘쓰는 것을 이렇듯 싫어해서야 무슨 일을 하겠느냐?"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즉시 걸어 가평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다시 도보로 올 것을 명령했다. 그 세 아들 중 한 사람이 이존수(李存秀·1772~1829)다.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李天輔)였다. 영의정의 손자요 현임 이조판서의 아들들이 말 타고 왔다가 불호령을 받고 걸어갔다가 걸어왔다.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이존수 또한 뒤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나고 말하고 침묵함이 법도에 맞았고, 지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