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597] 상유만경 (桑楡晩景)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최경창(崔慶昌·1539~1583)의 ‘채련곡(採蓮曲)’은 이렇다. “물가 언덕 아득하고 수양버들 늘어서니, 조각배 저 멀리서 채릉가를 부르네. 붉은 옷 다 진 뒤에 가을바람 일어나면, 날 저문 빈 강 위에 저녁 물결 일겠지(水岸悠悠楊柳多, 小船遙唱採菱歌. 紅衣落盡西風起, 日暮空江生夕波).” 어여쁜 아가씨들이 연밥 따며 부르던 고운 노래는 꿈결의 이야기였나? 붉은 연꽃 다 진 방죽 위로 가을바람이 한차례 훑고 지나가자, 저문 빈 강에는 쓸쓸히 저녁 물결만 남았다. ‘청창연담(晴窓軟談)’에 나온다. 허균(許筠·1569~1618)은 ‘힐난하는 이에게 대답함(對詰者)’에서 오활한 처세를 나무라는 그에게 대답한다. “내 성품 못난지라, 성글고 거칠어서, 기교를 못 부리고, 아첨도 못한다..

[정민의 世說新語] [596] 농이소미 (濃而少味)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첩 중 ‘자연(自然)’을 그린 그림의 화제(畫題)에는 “진한데 맛은 적으니, 이것은 영웅이 사람을 속여먹는 솜씨이다(濃而少味, 此英雄欺人手也)”라는 평이 달려 있다. 안개 자옥한 풍경 속에 우모(雨帽)를 쓴 낚시꾼이 낚싯대를 펼 생각도 없이 안개에 지워져 가는 건너편 풍경을 바라본다. 안개 낀 풍경은 지나치게 세세하면 안 된다. 그래서 건너편 숲은 아주 흐린 먹으로 뭉개듯 붓질을 겹쳐 놓았다. 맛이 적다고 말한 것은 맛을 일부러 줄여 감쇄시켰다는 뜻이다. 잘 그릴 수 있지만 일부러 못 그린 그림처럼 붓질을 어눌하게 해서 그림의 맛을 담백하게 했다. 그리고 이것이 영웅기인(英雄欺人)의 솜씨라고 설명했다. 영..

[정민의 世說新語] [595] 반일투한 (半日偸閑)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나라 때 이섭(李涉)은 ‘학림사 승방에 쓰다(題鶴林寺僧舍)’의 3-4구에서 “죽원에 들렀다가 스님 만나 얘기하니, 뜬 인생이 반나절의 한가로움 얻었구려(因過竹院逢僧話, 偸得浮生半日閑)”라고 노래했다. 시구 중 투한(偸閑)은 한가로움을 훔친다는 말이다. 한가로움은 일이 없다고 거저 오는 법이 없으니, 애를 써서 훔쳐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어렵게 노력해야 한가로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다 늙어 할 일이 없는 것은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무료한 것이다. 오늘 하루는 또 어찌 보내나 하고 한숨 쉬는 것은 한가로운 상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승소(李承召·1422~1484)가 남긴 시 ‘강정(江亭)’의 한 대목이다. “백년 인생 홍진 길에 발을 잘못 내딛다가..

[정민의 世說新語] [594] 고선포목 (枯蟬抱木)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규장각도서 장서인보’ 2책이 나왔다. 규장각 소장 고서에 찍힌 장서인만을 따로 모은 것이다. 반가워 살펴보니 유한준(兪漢雋·1732~1811)의 ‘자저(自著)’에 찍힌 큰 인장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인문(印文)이 ‘고선포목(枯蟬抱木)’이다. 고선(枯蟬)은 매미 애벌레가 성충이 되면서 나무 위에 벗어놓은 허물을 말한다. 선태(蟬蛻), 선각(蟬殼), 선퇴(蟬退)라고도 한다. ‘의림촬요(醫林撮要)’에 보면 선화무비산(蟬花無比散)과 선화산(蟬花散), 도인개장산(道人開障散) 같은 가루약에 쓰는 한약재로도 쓰인다. 매미 허물을 주성분으로 여러 약재와 섞어 가루 내어 복용한다. 눈이 짓무르거나 핏발이 설 때 증세를 완화시켜 준다. 박지원이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표현이 나온다. 이..

[정민의 世說新語] [593] 유초유종 (有初有終)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정조가 ‘경사강의(經史講義)’에서 말했다. “예부터 임금이 즉위 초에 정신을 쏟기는 쉬워도, 끝까지 훌륭한 명성으로 마치기는 어려웠다. 이는 지기(志氣)의 성쇠로만 논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한 무제(武帝)와 당 덕종(德宗)의 예를 들었다. 한 무제는 기원전 89년에 윤대(輪臺)에서 내린 조서에서 서역과 흉노를 상대로 벌인 전쟁을 후회하며,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은 자신의 지난 잘못을 인정했다. 이 조서가 유명한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다. 평생 전장을 누볐던 정벌 군주가 제 잘못을 직접 죄 주고, 정책 기조를 수문(守文)으로 전환했다. 처음은 나빴지만 끝이 좋았다. 당나라 덕종은 즉위 초에 당 태종을 본받겠다며, 코끼리를 풀어주고, 궁녀를 내보냈다. 아첨을 막겠다고 상서로..

[정민의 世說新語] [592] 난진이퇴 (難進易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맹자는 공자가 “예로써 나아가고 의로써 물러났다(進以禮 退以義)”고 높였다. 주자는 “세 번 사양한 뒤에 나아가고, 한 번 읍하고서 물러났다(三辭而進 一揖而退)”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주자가 일생 지킨 원칙은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나아감은 어렵게 하고, 물러남은 쉽게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예기’의 ‘표기(表記)’에 나온다. “임금을 섬기면서, 나아감은 어렵게 하고 물러남은 쉽게 한다면 자리에 차례가 있다. 쉽게 나아가서 어렵게 물러난다면 문란해지고 만다. 그래서 군자는 세 번 절하고 나아가서, 한 번 사양하고는 물러나 어지러워짐을 멀리 한다(事君難進而易退, 則位有序. 易進而難退, 則亂也. 故君子三揖而進, 一辭而退, 以遠亂也).”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이 뜻을 부연했다..

[정민의 世說新語] [591] 능체지심 (能體持心)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벗의 집을 찾아갔더니, 대문에다 이렇게 써놓았다. “눈은 깨끗하게 닦고, 발은 단정하게 선다. 등뼈는 꼿꼿하게 세우고, 아랫배는 단단히 묶는다(淨拭目, 定立足, 硬竪脊, 緊束腹).” 눈을 깨끗하게 닦아 맑게 보고, 발은 단정히 세워 똑바로 선다. 허리를 곧추 세워 기운을 통하게 하고, 허리띠는 단단히 묶어 단전에서 기운을 빼지 않는다. 문을 들어설 때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를 갖추겠다는 뜻이다. 서정직이 세 번을 되풀이해 읽고는 탄복하며 말한다. “선비로구나. 진실로 능히 이 네 가지를 행할 수만 있다면, 잘될 경우 그 공렬이 우뚝하겠고, 궁하게 살더라도 그 절조를 숭상하겠다(士乎! 信能体此四者, 達行則偉其㤠, 窮居則尙其節).” 명나라 서정직(徐禎稷)의 ‘치언(耻言)’에 나온다...

[정민의 世說新語] [590] 호승감녕(好勝甘佞)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나라 육지(陸贄‧754~805)의 주의(奏議)는 명백하면서도 핵심을 찔러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모범 사례로 꼽혀 왔다. 그가 임금에게 올린 글을 모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가 엮어졌을 정도다. 정조도 ‘육주약선(陸奏約選)’과 ‘육고수권(陸稿手圈)’을 펴냈다. 금번 당윤희, 오수형, 장유승 세 분이 옮긴 책(서울대 출판문화원)을 읽어보니 글의 대구가 정연하고 가락이 착착 붙어, 과연 명불허전이다. ‘봉천에서 여러 신하를 자주 만나 일을 논할 것을 청하는 글(奉天請數對群臣許令論事狀)’에서 말했다. “위에서 이기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아첨하는 말을 달게 여기고, 위에서 허물을 수치스러워하면 틀림없이 직간을 꺼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아첨하는 신하가 임금의 뜻만 따르게 되..

[정민의 세설신어] [92] 교부초래(敎婦初來)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남자는 가르치지 않으면 내 집을 망치고, 여자는 가르치지 않으면 남의 집을 망친다. 그러므로 미리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부모의 죄다. 당장에 편한 대로 은애(恩愛)하다가 무궁한 근심과 해악을 남긴다." 이덕무(李德懋)가 '사소절(士小節)'에서 한 말이다. 뜨끔하다. 이런 말도 보인다. "망아지는 길들이지 않으면 좋은 말이 될 수 없고, 어린 솔은 북돋워주지 않으면 훌륭한 재목이 될 수 없다. 자식을 두고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내다버리는 것과 한가지다." 나무도 어릴 때부터 체형을 잡아주고 곁가지를 쳐주어야 바르고 곧게 자라 재목감이 된다. 날뛰는 망아지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도 사람이 탈 수가 없다. 아들 낳아 제 집을 망치고, 딸을 길러 남의 집을 망친다면 큰일이 아닌가. 결..

[정민의 世說新語] [589] 분토취부 (糞土臭腐)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진(晉)나라 때 어떤 사람이 은호(殷浩)에게 물었다. “어째서 벼슬을 얻게 될 때는 관이 꿈에 보이고, 재물을 얻으려 할 때는 똥이 꿈에 나오는 걸까요?(何以將得位而夢棺器, 將得財而夢矢穢.)” 은호가 대답했다. “벼슬이란 본래 썩은 냄새인지라 얻으려 할 때 관 속의 시체를 꿈꾸고, 재물이란 본시 썩은 흙과 같아, 얻게 될 때 더러운 것이 꿈에 보이는 것일세.(官本是臭腐, 所以將得而夢棺屍. 財本是糞土, 所以將得而夢穢汚.)” ‘세설신어’에 나온다. 강항(姜沆‧1567~1618)이 벗 권제(權霽)의 청몽당(淸夢堂)에 놀러 갔다가, 기문(記文) 부탁을 받았다. 청몽(淸夢)의 뜻을 묻자 권제가 말했다. “벼슬은 썩은 냄새로 꿈에 관을 본 자는 벼슬을 얻고, 재물은 썩은 흙이라 꿈에 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