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304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4> 結草報恩

맺을 결(糸- 6)풀 초(艸 - 6)갚을 보(土 - 9)은혜 은(心 - 6) '左傳(좌전)'의 '魯宣公(노선공)' 15년에 나오는 이야기다. 晉(진)나라의 魏武子(위무자)에게 애첩이 있었는데, 자식을 두지는 못하였다. 위무자가 병이 들자, 아들 魏顆(위과)를 불러 이렇게 분부하였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 여자를 改嫁(개가)시켜라!" 그런데 병세가 더 깊어지자 다시 분부하였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 여자를 殉葬(순장)하라!" 마침내 위무자가 죽자, 위과는 여자를 개가시키면서 말하였다. "병세가 깊어지면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법입니다. 나는 아버님이 정신을 잘 추스를 때 하신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 뒤 위과가 輔氏(보씨) 땅에서 秦(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 한 노인이 풀을 묶어서 秦(진)나라의 力士..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3> 性善과 德治

- 본바탕 성(心-5) 착할 선(口-9) 덕 덕(彳-12) 다스릴 치(水-5) 앞서 楚(초)나라 莊王(장왕)이 九鼎(구정)의 크기와 무게에 대해 물었을 때, 王孫滿(왕손만)은 '昏德(혼덕)'과 '明德(명덕)'으로 대답했다. 혼덕이란 자신의 마음이나 능력을 잘못 알고 그릇되게 쓰는 데서 비롯된 내면의 상태다. 이와 달리 본래의 덕을 그대로 드러내어 밝게 쓰는 것이 명덕이다. 왕손만은 비록 周(주) 왕조의 덕이 쇠퇴했지만 여전히 그 덕의 殘香(잔향)이 천하를 감돌고 있으며, 장왕에게는 그 잔향을 이길 만큼의 덕조차 없음을 넌지시 그러나 따끔하게 지적하였다. 아무리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더라도 덕이 결여되어서는 天命(천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니, 요컨대 "너 따위가 구정의 크기나 무게를 묻다니, 애초부터 번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2> 昏德과 明德

- 어두울 혼(日-4)덕 덕(彳-12) 밝을 명(日-4)덕 덕(彳-12) 춘추시대 이전에 이미 낌새가 있었지만, 춘추시대가 시작되면서 덕보다 힘이 대세가 되었다. 예악이 무너졌다는 것도 이런 뜻에서 한 말이다. 예악의 토대가 바로 덕이기 때문이다. 덕이 간과되면, 당연히 예악은 설 곳이 없다. 그나마 有名無實(유명무실)해진 주 왕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덕이 정치의 근간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악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러한 인식까지 단번에 바뀌지는 않는 법이다. '左傳(좌전)'의 '魯宣公(노선공)' 3년에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606년, 楚(초)나라 莊王(장왕)이 陸渾(육혼)에 사는 오랑캐 戎(융)을 치고 난 뒤에 그 위세를 몰아 雒水(낙수)로 가 周(주)나라 영토 안에서 군사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1> 利用厚生

날카로울 리(刂-5) 쓸 용(用-0) 도타울 후(厂-7) 살 생(生-0) 周穆王(주목왕, 기원전 977∼922)이 犬戎(견융)을 정벌하려 하였다. 이때 祭公(제공) 謀父(모보)가 간언하였다. "안 됩니다! 선왕들께서는 덕을 빛내셨지 군사력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군사는 거두어 두었다가 알맞은 때에 움직이는 것이니, 그때 움직이면 위세를 떨칩니다. 그러나 함부로 과시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면 위세를 떨치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에 周文公(주문공)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창과 방패 거두고, 활과 화살 활집에 넣노라. 나 아름다운 덕을 구하여 이 중원에 베푸나니, 참으로 왕께서 천명을 지키시네.' 선왕들께서는 백성이 덕을 바르게 하여 본성을 도탑게 하도록 힘쓰시고, 필요한 재물을 넉넉하게 해..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0> 明明德

밝힐, 밝을 명(日-4) 덕 덕(彳-12) 明明德(명명덕)은 "밝은 덕을 밝히다"는 뜻이다. 왜 그냥 '덕'이 아니라 '밝은 덕'인가? 이는 강조한 것이다. 강조한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懇切(간절)하고 切實(절실)하다는 뜻이다. 왜 간절하고 절실한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데 긴요한 것, 집안을 가지런히 하거나 나라를 다스리거나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냥 덕이라고 할 것이지, 왜 구태여 밝은 덕이라 했는가? 이는 '大學(대학)'이 쓰였던 그 시대적 상황에 말미암은 것이다.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혼란과 전쟁이 거듭되어 제후나 귀족, 백성 모두 위태롭고 괴로웠던 시절, 사람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 가장 약화되어 好利之性(호리지성) 즉 "이익을 좋아하는 본성..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9> 不由其誠, 不盡其材

아니할 불(一-3) 말미암을 유(田-0) 그 기(八-6) 지극할 성(言-7) 다할 진(血-9) 재주 재(木-3) 공자는 "有敎無類"(유교무류)라 하여 배우기를 바라고 찾아온 이라면 그 신분을 묻지 않고 누구에게나 가르쳤다. 공자로부터 私學(사학)이 시작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면 누가 공자를 찾아가서 배우려 했으며 무얼 배우려 했는가? 벼슬을 하고 싶은 미천한 이들이 찾아가서 仁義(인의)와 禮樂(예악)의 정치를 배웠다. 그런데 벼슬이라는 목적에 집착하면 얄팍하게 배우는 데서 그치고, 욕심이 앞서면 의도치 않게 옆길로 샌다. '論語(논어)' '泰伯(태백)'편을 보면,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삼년학, 부지어곡, 불이득야)라는 구절이 나온다. "3년 동안 배우고도 녹봉을 구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8> 玉不琢不成器

구슬 옥(玉-0) 아니할 불(一-3) 쫄 탁(玉-8) 아니할 불(一-3) 이룰 성(戈-3) 그릇 기(口-13) 예나 이제나 정치나 종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자신들의 신앙을 으뜸으로 여기면서 다른 주장이나 신앙을 무조건 배척하며 이단으로 내모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목표나 목적에 집중하고 집착하면서 그 과정을 간과하거나 도외시한 탓이다. 이상적인 명분이나 목표를 내세우면서도 도리어 차별과 배척, 폭력과 억압을 저지르며 끊임없이 분란과 분쟁을 조장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大學(대학)'도 세속 정치의 길을 제시하는 유가의 경전이다. 동아시아의 모든 지식인이 한결같이 외고 있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이상, 그 이상이 자칫 아집과 독선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점을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7> 大學之道

큰 대(大-0)배울 학(子-13)갈 지(丿-3)길 도(辵-9) 앞으로 '大學(대학)'의 원문 전체를 한 글자 한 글자씩 따져서 읽고 풀이하며 해석할 것이다. 현재 널리 읽히고 있는 朱熹(주희)의 '大學章句(대학장구)'가 아닌 '古本大學(고본대학)', 즉 '禮記(예기)'에 실려 있던 본래의 '대학'을 다룬다. 그래야 '대학'에 담겨 있던 정치철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학'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가까이하는 데 있으며, 지극히 좋은 것에 머무는 데 있다." '대학'이라는 글이 지향하는 바가 매우 간결하게 정리되어..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6> 武帝와 太學

굳셀 무(止-4)임금 제(巾-6) 클 태(大-1)배울 학(子-13) 漢(한) 제국을 안정시킨 文帝(문제)는 학문하는 선비를 등용하기는 했으나,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이어 제위에 오른 景帝(경제)는 강성해진 제후들을 굴복시켜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仁義(인의)의 정치를 펼 겨를이 없었다. 경제는 즉위 3년째에 일어난 '吳楚七國(오초칠국)의 난'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대부 晁錯(조조)를 서슴없이 희생시킬 정도로 냉철하고 냉혹한 군주였다. 그는 법가적 군주의 성향이 강했다. 이윽고 경제를 이어 즉위한 武帝(무제, 기원전 141∼87 재위)가 儒學(유학)에 관심을 가지고 유학에 밝은 선비들을 대거 기용했다. 이때 重用(중용)되어 유학이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인물이 公孫弘(공손홍,..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5> 賈誼와 改革

- 값 가(貝-6)옳을 의(言-8)고칠 개(攵-3)바꿀 혁(革-0) 천하를 一統(일통)한 秦(진)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무너졌고, 다시 들어선 漢(한) 제국 또한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高祖(고조) 劉邦(유방)이 통치할 때도 곳곳의 諸侯王(제후왕)들이 謀叛(모반)하고 또 북방의 흉노가 남하하여 불안과 위기가 지속되었는데, 고조 사후에는 呂太后(여태후)가 권력을 잡고 呂氏(여씨) 일족이 전횡을 일삼는 바람에 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자 太尉(태위) 周勃(주발)과 丞相(승상) 陳平(진평) 등이 여씨 일족을 제압하고 代王(대왕)으로 있던 고조의 넷째 아들 劉恒(유항)을 맞아들여 옹립했다. 그가 제국의 기틀을 다지며 안정적으로 통치한 文帝(문제)다. 문제는 제국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