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복수초(福壽草)

bindol 2022. 10. 8. 11:24

[이규태 코너] 복수초(福壽草)

조선일보
입력 2005.02.13 16:48
 
 
 
 

대관령 눈 속에서 노랗게 피어난 복수초가 보도되었다. 해빙기의 히말라야에서 마치 유리그릇 속에서라도 피어나듯 얼음 속에서 맨 처음 피어나는 것도 복수초 같은 노랑꽃이다. 등반 때 짐을 나르는 고산족들은 이 노랑꽃을 보면 주문(呪文)을 외우며 캐어서 머리에 꽂곤 했다. 그렇게 하면 사고나 불행한 일로부터 보호받는다 했다.

우리나라 눈 얼음 속에 피어나 행복과 장수를 보장받는 복수초와 일맥상통하는 히말라야 복수초다. 복수초를 위시하여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피어나는 꽃들은 모두가 노랗다. 해동과 더불어 산에서 제일 먼저 피어나는 산수유가 노랗고 들판의 선두주자인 민들레도 노랗다.

울타리의 선두주자는 노란 개나리요, 서릿발 속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있는 것도 노란 국화다. 추위를 이겨내고 피는 꽃에 복수(福壽)라는 미덕을 부여한 것은 춥고 배고픈 곤궁 속에서만 복(福)과 수(壽)가 태어난다는 우리 민족의 체험 진리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노랑꽃은 춥고 배고프고 아픈 것만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해 겨울 미국 오클라호마를 여행했을 때 고속도로 복판에 새끼를 둘러쳐 놓고 돌아가게 해놓은 곳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내려가 본 일이 있다. 무거운 아스팔트 판을 이고 작은 노랑꽃들이 콩나물처럼 가지런히 떠받치고 돋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근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산 교육장으로 보존되고 있었는데, 천천히 꾸준하면 저 작은 꽃들이 아스팔트를 이고 돋아나듯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가혹했던 인간학살 공장인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외벽은 개미 한 마리 기어다니지 않는 생명의 거부공간이요,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마저도 없는 사각(死角)이다. 구름도 이 상공을 지날 때면 그늘을 거부한다고 한 시인이 읊기까지 했던―지구상 생명 부정의 가장 살벌한 현장이다.

한데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던 수용자들의 절망의 얼굴에 화사하게 웃음을 머금게 한―그리고 그 표정으로 죽어가게 한 위대한 무엇이 그 공간에 있었다. 바로 그 외벽의 헌 틈새에 유일하게 피어난 한 송이 작은 노란 꽃이었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