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멕시코 哀史
[이규태 코너] 멕시코 哀史
노예노동으로 고통받았던 멕시코 이민 최초의 사진이 보도되어 눈길을 끌었다. 멕시코 이민선이 인천을 떠난 것은 꼭 100년 전인 1905년 3월 6일이요, 멕시코 유카탄에 도착한 것은 5월 12일, 어저귀라는 가시 돋친 섬유작물 농장에 분산 수용된 것은 그 사흘 후다.
이 이민사진의 촬영이 1905년 5월로 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농장에 배치된 직후의 사진이며 한국에서 입고 간 바지 저고리에 짚신 차림의 이민도 볼 수 있음은 그 때문이다. 소년들도 7~8명 보이는데 아버지 어머니 따라온 이민가족으로 큰 아이는 하루 품삯이 25전, 작은 아이는 12전이었다. 어른 품삯은 35전인데 하루 식량값으로 1인당 25전을 거둬갔으니 4년 동안 계약노동은 그저 먹고 자는 것으로 족하는 노동이었다.
숙소도 토굴인지라 자다가 독사에 물려 오래 앓아 누워있으면 산 채로 어디론가 내다 버려졌다. 도망치지 못하게끔 모든 이민에게 철환(鐵丸)을 쇠사슬로 발에 매어 일을 시켰으며 군데군데 초소에는 스페인 감시원이 20미터 남짓의 가죽채찍을 휘두르며 감시를 했다.
이 이민선의 짐짝 속에 숨어 밀항하던 한 젊은 여인이 발각되었었다. 상가(喪家)를 돌아다니며 울음을 팔고 살던 인천의 곡비(哭婢)인데 강제 하선시키려는 것을 이민자들이 단합, 단식투쟁으로 더불어 이민할 수 있게 했다. 배에서 두 사람의 이민자가 죽었을 때, 그리고 멕시코에 정착 후 모진 학대나 병으로 죽었을 때 이 곡비는 단골로 거적 시체 앞에서 구슬피 울었으며 그 울음에 촉발되어 같은 신세를 한탄하는 이민자들의 통곡이 밤을 새우곤 했다고 40여년 전 고향 울주에 돌아온 멕시코 이민 김치환옹이 회고했다.
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궤짝네로 불렸던 이 곡비는 농장 지배인인 스페인 남자의 첩이 되어 산장에서 살며 까만 비로드 드레스에 스페인 자수 장화, 머리통보다 큰 꽃을 단 보닛을 쓰고 마차를 굴려 농장길 달리며 군림, 고자질로 이민을 무척 괴롭혔다 하니 망국(亡國)이 가져다준 별난 인생유전이다.
그 멕시코 이민 백년 통사(痛史)를 보존하고 애환을 아로새기는 기념관을 인천과 멕시코 현지에 지어 세월의 망각에서 민족의 상처를 구제했으면 하는 것이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