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세모 고해(告解)

bindol 2022. 10. 9. 15:38

[이규태 코너] 세모 고해(告解)

조선일보
입력 2004.12.30 18:19
 
 
 
 

80여년 전 일이다. 미국 뉴욕 선지(紙)에 버지니아라는 소녀가 투서를 했다. “기자님, 저는 여덟 살 난 소녀입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니 꼭 가르쳐 주십시오. 산타클로스가 정말 계시는 것입니까”라고…. 이 물음에 대해 신문사는 애정 담긴 답변 사설을 썼다. “이 세상에 사랑이나 남을 배려함이며 진심이 있는 것처럼 산타클로스도 분명히 있다” 하고, 신뢰·상상력·시·사랑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고 또한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응어리를 알아 풀어주신다고 했다.

물론 질문을 한 소녀나 사설을 쓴 기자는 이 세상을 떴지만 이 사설은 고전이 되어 지금도 미국 가정에서는 세모에 부모들이 자녀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마음의 황금이 되고 있다. 아마도 물질문명이나 합리주의 풍조가 거센 데 대한 반동으로 소녀에게의 회답이 오랜 반향을 지속해 내렸음 직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러시아정교의 상징인 러시아십자가 아래 가족·친지들이 세모에 모여 지난해 저질렀던 과실로 남을 해친 일을 차례로 고해하여 가는 해의 마음의 앙금을 씻어내는 대목이 있다. 이처럼 환상적 초월자의 설정은 이해와 물질주의에 찌든 인간의 어두운 면을 정신적으로 구제하는 수단으로 문명권마다 연말의 관행으로 정착했다.

우리나라 섣달그믐날 밤 마루 곳간 샘터 측간 온 집안에 불을 밝히고 아이들에게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 하여 잠을 자지 못하게 했던 세모민속도 그것이다. 부엌신(神)인 조왕(?王)님이 1년 내내 집사람들의 언행을 살펴 그 선악을 치부해두었다가 동짓날 상천 옥황상제에게 고하고 그에 응분한 이듬해의 화복(禍福)을 타 들고 섣달그믐날 굴뚝을 통해 돌아오는데 그 조왕님을 경건한 마음으로 맞고자 집안을 밝히고 잠을 못 자게 했다.

졸리게 마련인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정말로 조왕님이 있느냐고 묻게 마련이다. 어머니는 “계시고 말고…” 하고 지난해 네가 잘못을 저지르고 숨겨둔 일을 말하면 옥황상제님이 하늘에서 듣고 용서하신다 하고 실토를 재촉했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세모 고해민속이 전통사회의 한국인을 얼마나 정신적으로 순화시키고 선량하게 했는가 새삼스러워진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