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코너] 서약하는 돌

bindol 2022. 10. 13. 17:05

[이규태코너] 서약하는 돌

조선일보
입력 2004.06.30 18:40
 
 
 
 

서양사람들은 성서에 손을 얹고 서약을 하지만 신라사람들은 돌멩이에 서약 내용을 적어 성소(聖所)에 묻음으로써 하늘의 보증을 받았다.

1935년 당시 경주보통학교 교장이던 일본인 오사카(大阪金太郞)란 분이 경주 근교 금장대(金丈臺)에 소풍갔다가 그 꼭대기에 앉아 쉬는데, 발에 돌 하나가 차였다. 주워서 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어 판독하니 “임신년 6월 두 사람이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동안 나라에 충성하며 과실 없기를 빌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하늘이 큰 벌을 내려도 감수할 것을 다짐한다. 난세가 되더라도 이 약속은 행할 것을 아울러 서약한다. 앞서 신미년 7월에 약속했듯이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전(傳)을 차례로 익힐 것을 맹세하되 3년 안에 다하기로 다짐한다.”

홍안의 신라 젊은이 둘이서 애국과 면학 목표를 하늘로 하여금 보증하는 ‘글돌’이 일천 수백년 만에 햇볕을 본 것이다. 경주 남산에 성을 쌓고 성을 쌓은 사람 연명으로 이 성이 3년 안에 무너지면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을 맹세한 서석도 그것이다. 요즈음 건설공사에 도입했으면 싶은 서약하는 돌이 아닐 수 없다. 하늘과 직결된 양심의 백지에 약속한 사항인지라 오늘날의 법률이 보증하는 계약서의 약속과는 그 이행 농도가 비교되지 않는다.

 

이 서약의 돌이 발견된 금장대는 경주로 흐르는 남천 북천 서천이 마주치는 여울을 안고 있고, 그 위에 올라 둘러보면 경주의 영산들이 한눈에 담기는 삼각정점의 영지(靈地)로 지금도 기와나 도자기 조각이 널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천심과 민심을 접속하는 신당이 세워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한국인의 이 싱그러운 정신문화의 희귀한 증거물인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 보물로 지정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희귀한 정신문화재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사람을 정직하게 하는 신앙문화재라는 비중으로 미루어 너무 뒤늦고 처지는 자리 매김이 아닐 수 없다. 손바닥만한 돌멩이이기에 그에 내포된 정신가치마저 소외당한 것이었을까.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