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코너] 태극기의 기원
[이규태코너] 태극기의 기원
제물포조약에 따라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朴泳孝)와 김만식(金晩植) 두 사람이 수신사로 인천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것은 1882년 9월 21일이었다. 당시 일본공사였던 하나부사(花房義質)도 동행했었는데 이 선상에서 국기의 필요성을 절감, 박영효에 의해 태극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본측 기록에 보면 이미 그 6년 전인 강화조약 때에 국기의 필요성이 화제가 됐었고 하나부사가 자기 나름대로 청백홍(靑白紅)의 삼파(三巴)무늬의 국기 도안을 그려 사용할 것을 종용했다 한다. 선상에서의 박영효의 국기 도안에 하나부사가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노블 목사의 후손이 보관해온 태극기를 3년 전에 공개했었는데 그 보관함에 ‘공주 박영효 부인’이라 씌어 있어 태극기의 시작이 박영효라는 설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한데 박영효가 태극기를 처음 만들었다는 그 두 달 전인 1882년 7월에 출간된 것으로 보이는, 미 해군성 항해국의 세계국기도감에 태극무늬와 사괘가 그려진 태극기가 실려 있는 사실이 발견·공개됨으로써 태극기는 박영효 이전에 국기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박영효가 수신사로 떠나기 넉 달 전에 있었던 한·미수호조약 조인 때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 조인식 준비과정에서 국기의 필요성이 논의되자 회담을 간섭하기 위해 온 청나라 특사 마건충(馬建忠)이, 당시 청나라 국기인 황룡기(黃龍旗) 도안을 동방색인 청룡기(靑龍旗)로 바꾸되 용 발톱을 네 개로 줄여 속국임을 나타내게 하려 했다.
이를 거부한 김홍집(金弘集)은 임금은 붉은 옷이요 관리는 푸른 옷이며 백성은 흰옷이라 하여 흰 바탕에 홍청의 태극무늬를 제시하자, 마건충은 태극을 붉은 용과 푸른 구름으로 절충하려 했지만 그리기 복잡하다는 이유로 태극에 팔괘를 둘러 정착한 것이다.
한·미수호조약 조인식 두 달 후에 발행된 미국 국기도감에 실렸다면 이 태극 도안의 국기가 조인식에서 국기 구실을 한 것이 되며, 국기로 공식적으로 팔도에 공포한 1883년 3월 6일 이전에 국제적으로는 행세했던 태극기다.
(이규태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