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도청
[이규태 코너] 도청
우리 고전소설들에 남녀 할 것 없이 악역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심청전의 뺑덕어멈, 흥부전의 놀부, 장화홍련전의 장쇠 등등. 이들의
행실 적은 것 가운데 하나가「쥐소리만 나도 귀 기울인다」는 것이다.
엿듣는 동작으로, 인성으로 보아 악인이요 도덕으로 보아 악덕인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옛날 부자가 맞을 매를 대신 맞는 것을 매품
판다고 한다. 흥부가 애써 얻은 매품의 선금으로 양식을 사다가 굶주린
새끼들 먹이고 있는데 흥부집 거적문 밖에서 도청꾼이 귀 기울여 엿듣고
그 매품을 가로챈다.
장화 홍련을 해치려는 계모 허씨는 자기 소생의 장쇠로 하여금 언행을
엿보고 엿듣게 하여 음모를 꾸민다. 한국 고전소설의 기본철학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이요 고전 소설 속에 도청 등장이 잦은 것을 보면
악덕 중의 악덕임을 알 수 있다. 방 앞에 이르러 신이 두 켤레 있고
말소리가 나거든 들어가지 말고 짐짓 자리를 피하고, 신발이 없고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반드시 건기침을 하도록 가르쳤다.옛어머니들, 귀 기울여
듣는 시늉만 지어도 시집 못 간다고 나무랐던 것이다. 한국에 별나게
발달한 건기침은 엿듣고 엿보는 행위의 예방 문화요 그를 얼마나
악덕시했는가의 증명인 것이다. 시집갈 때 눈에 꿀칠하여 보지 못하게
하고 귀를 솜으로 막아 듣지 못하게 하며 입에 대추를 물려 말하지
못하게 했던 것도 시집살이에서 남의 언행일랑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인생교훈이었다.
인조 2년 김경현이라는 아전이 그의 누이동생이 보낸 한글 편지를
근거로 그 누이의 남편인 김홍원(金弘遠)이 모반을 음모했다는
고변(告變)을 했다. 지체없이 임금에게 통달되자 인조는 그 음모 여부를
따지기 전에 지아비의 말을 숨어서 엿듣고 남편을 고발하는 여인이 생긴
것을 자신의 부덕으로 한탄하고,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것은
대사(大事)요 국가 변란의 음모는 소사(小事)라는 명언을 남겼다. 도청은
불법이나 악덕 이전에 한국인의 인성 원형질에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원초적 독소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촌락공동체 사회였기에 그 신뢰를
누수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도청 폭로로 정가가
뒤숭숭한데, 드러난 사안보다 민심에 뿌려지는 그 독소야말로 빙산의
저각(底角)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