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무기로 만든 의자

bindol 2022. 11. 19. 15:17

[이규태 코너] 무기로 만든 의자

조선일보
입력 2002.10.08 20:25
 
 
 
 


태평치세를 구가할 때 단골로 쓰는 말이 있다. "창검(槍劍)을 녹여
괭이를 만들고 죽창을 잘라 피리를 만든다"는 것이 그것이다.죽창을
잘라 만든 피리를 불어 불행이나 병액(病厄)을 쫓는 무당 이야기가
야사에 나오는것으로 미루어 창(전쟁)보다 피리(평화)가 강하다는 사상이
서민 간에 번져 있었음을 알게 한다. 신라 신문왕때 그 피리를 불어
왜적을 물리치고 국사에 불행한 일이 있으면 그 피리를 불었다던
만파식적(萬波息笛)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동·서독을 갈랐던 장벽을 허물 때 그 벽돌과 콘크리트 파편을 모아
파는 노점상이 즐비했었다. 그 부숴진 벽돌 조각을 사 가져가 정원이나
현관에 수반(水盤)을 만들고 물을 담아 수초(水草)를 띄우고 꽃을 기르고
있음을 보았다. 그 벽돌짝에는 어느 지역 지상 몇미터의 장벽 조각이라
씌어 있었다. 독일의 고도 드레스덴에 2차대전 말의 대폭격으로 박살난
성모교회가 있다. 그 크고 작은 폭파 파편들을 모아 퍼즐 맞추듯
재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전 후 노벨상을 탄 독일 사람들은 그
상금을 이 전쟁의 잔재로 평화물을 창조하는 데 기부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다고 들었다. 종교적 가치 때문만도 아니요, 옛것을 아끼는
마음에서뿐만이 아니다. 죽창을 잘라 피리 만드는 평화 염원의 크기를
그에서 보는 것이다.

휴스턴 와이드 오크 숲속에 한국전 참전 텍사스지역 용사의 집이 있다.
노병들이 부부간에 모여 친목을 다지는 데 그중 한 노병이 녹슨 철사로
조악하게 만든 열쇠고리를 보여주며 한국전선에 근무하던 자기
분대원끼리 인근 철조망을 잘라 열쇠고리 하나씩을 만들어 기념으로
나누어 가진 것이라 했다. 허리에 찬 채로 죽을 것이라던 그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파주시에서는 한반도의 허리를 반백년 넘게 잘라온 휴전선의 낡은
찰조망을 길이 20㎝로 잘게 잘라 액자에 넣어 휴전선 관광 기념품으로
팔아왔으며, 도라산에서도 평화 염원의 기념품으로 철조망이 팔리고
있다. 10년간의 지루한 내전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한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한 조각가가 전장에서 주워 모은 총기류의 쇠붙이를 녹여
만든 평화의 의자를 교황 바오로 2세에게 선물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전쟁을 재우는 만파식적이 아니라 만파식의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