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조강수의 시선] 유병진 판사처럼 고뇌하라

bindol 2019. 3. 11. 05:41

검찰의 사법부 수사로 법관 80여 명 주홍글씨 낙인 찍혀
양승태 정책 직접 추진했다가 사달, 검찰은 판사 반격 걱정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어느 부장검사가 들려준 경험담 한 토막이 기억난다. “비리 건설업체를 압수수색하던 중 금품 액수와 판사 이름이 적힌 메모를 발견했다. 수사를 해야겠다고 검사장에게 보고했더니 종이를 낚아채서는 입으로 우적우적 씹어먹더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판사 개인의 비리 수사조차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웅변하는 일화다.
 
자칭 ‘촛불 정부’ 출범 직후 물갈이로 ‘조선시대 신진 사대부가 장악한 사헌부’쯤 되는 검찰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법관 집단’을 수사한 성적표를 지난주 내놨다. ‘전·현직 법관 10명 기소(앞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포함 시 14명). 현직 법관 66명 대법원에 비위 사실 통보. 이동원·노정희 대법관 등 10명 참고자료 전달.’ 숫자만 놓고 보면 노태우 정부 때 범죄와의 전쟁으로 굴비 엮듯 한 조직폭력배 검거 실적이 연상된다. 직전 대법원장은 감옥에 갇혔고 판사 탄핵소추도 진행형이다. 66명에겐 ‘적폐 연루’의 주홍글씨가 찍힌 격이다. 국내 사법사상 전례가 없는 ‘사법 사화(士禍)’다.
 
수사 결과는 논쟁적이다. 치열한 법적 다툼이 예상된다. 양승태가 법원의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를 위해 사법행정권을 남용하고, 독립기관인 판사들이 이에 부응해 재판 비밀을 제공했다는 게 주요 혐의다. 대법원장 등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한 데는 판사들의 책임도 있겠지만,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 행사를 수발하는 행정처의 존재가 초래한 폐해이기도 하다. 수사 초기 요란하고 창대했던 ‘재판 거래’ 프레임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검찰은 할 말이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요청해 수사에 착수한 것이지 우리가 먼저 나선 게 아니고 대법관 제외 등 기소 대상도 최소화했다”고 주장한다. 검찰 고위 관계자에게 최소화의 이유를 물었더니 비장한 답이 돌아왔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수사 초기부터 수사팀 검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검찰이 이런 수사를 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무한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철저히 하라. 이번 사건은 수사로 끝나는 게 아니다. 기소된 판사들이 법률 전문가들인데 가만히 있겠나. 피의사실 공표로 검사들을 형사 고소하고 그에 따른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이 형사 고소 사건을 무혐의 처분하면 판사들은 즉각 항고하고 결국은 재심까지 갈 것이다. 재심은 법원 권한이다. 판사가 기소하고 판사가 판결한다. 그리고 손해배상금을 마구 올려 1억원씩 때리면 꼼짝없이 물어줘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취지였고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된다는 거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최근 보석 심문장에서 “흡사 조물주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검찰이 내 공소장을 만들었다”며 검찰 수사를 강하게 비난했지만 그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법 사화’의 출발점은 상고법원 도입 추진이었다. 양승태의 가장 큰 실수는 사법부 위상 강화를 위해 직접 정책 관철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임종헌 전 차장이 국회와 행정부의 사법 민원 창구역할을 하며 재판에 관여한 게 사달이 났다. 결국 정치권이 첨예한 이슈를 사법부에 던지는 ‘정치의 사법화’가 문제이듯, 법원이 직접 정책 추진에 뛰어든 ‘사법의 정치화’가 화를 불렀다.
 
9개월 수사가 끝나고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동안의 수사과정에서 법원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불신지옥’에 더해 동료가 동료를 재판하는 ‘재판지옥’의 문도 열리고 있다. 판사는 ‘극한 직업’이 됐고, 시대는 법관들이 행정과 정책과 정치와 손을 끊고 제대로 된 판결의 세계에 침잠하기를 요구한다. 사법부가 폐허에서 다시 서려면 일선 판사들이 유병진 판사처럼 고뇌해야 한다.  
     
고(故) 유병진(1914~1966) 판사는 서울지법 판사로 재직하던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이듬해 1·4 후퇴때까지 3개월간 6·25 부역자 처단 재판을 담당하면서 법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하고 성찰했다. 전시 비상조치령(대통령 긴급명령 1호)에 의한 단심제로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규정됐지만 깊은 사색을 통해 가벌성이 낮은 경우 무죄 또는 집행유예를 선고해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아무리 법이라 한들 진리에 어긋나는 한 단연코 이에 항쟁하여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살려야 한다. 오직 결단과 용기로써 진리의 옹호에로의 과감한 돌진이 있을 뿐이다”라고 설파(법률논집 『재판관의 고민』)하면서다. 유 판사는 1958년 7월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건의 1심에서 간첩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국가보안법은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 선고) 이로 인해 용공판사로까지 몰렸던 그는 5개월 뒤 자유당 정권에서 법관 연임을 거부당했지만 그게 평생의 훈장이 됐다.
 
조강수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조강수의 시선] 유병진 판사처럼 고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