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92

미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 중 현대 사상·문화에 큰 영향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8〉 중국 체류 기간 옛 제자 후스(왼쪽 첫째)와 장멍린(오른쪽 첫째)의 안내로 이허위안(颐和园)을 유람 중인 듀이 부녀. [사진 김명호] 20세기 초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개혁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말만 좋았지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출로를 놓고 갈팡질팡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를 초청해 귀를 기울였다. 하고많은 서구의 지식인 중 듀이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컬럼비아대학 교수 시절 미국이 토해낸 경자년 배상금으로 유학 온 중국 청년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후스(胡適·호적)와 평민 교육가 타오싱즈(陶行知·도행지), 철학자 펑유란(馮友蘭·풍우란), 베이징대학 교장(총장)을 가장 오래 역임한 장멍린(蔣夢麟·장몽린), 난카이(南開)대학 교장 장..

미 제1 갑부 록펠러가, 중 공산화 후에도 통 큰 기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7〉 협화의학원 예과생들은 3년간 옌칭(燕京) 대학에서 인문교육을 받았다. 1920년대 옌칭 대학의 여자야구부. [사진 김명호] 19세기 말, 미국 제1의 부자로 등극한 록펠러는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심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던 록펠러는 자신을 기쁘게 했던 돈이 타인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기부를 결정하자 시작과 동시에 도움 청하는 개인과 단체가 줄을 이었다. 기부받는 사람은 묘한 속성이 있었다. 매년 1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해도 요구가 그치지 않았다. 거부하면 ‘만악(萬惡)의 자본가’라며 비난이 들끓었다. 가재를 탕진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자 한곳에 집중하기로 작심했다. 은퇴를 선언하고 장원(莊園)에 칩거했다. 중 문명·지식인 우수성에 경외..

미 록펠러재단 거금 지원 덕에 ‘베이징원인’ 발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6〉 1925년 3월 19일, 국부 쑨원의 출상(出喪)을 배웅하기 위해 협화병원 문전에 운집한 학생들. [사진 김명호] 중국공산당 창당 2개월 후인 1921년 9월 19일 오전, 록펠러재단이 설립한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과 협화의원 낙성식이 열렸다. 바다에서 1개월을 보내며 베이징에 온 록펠러 2세의 연설은 간단했다. “중국인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왔다. 서구의 의학과 과학이 중국인의 정신세계와 사유에 보탬이 되기를 고대한다.” 식전에 참석한 베이징대학 교수 후스(胡適·호적)는 감동했다. 일기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엄숙한 전례(典禮)였다. 100명이 넘는 서구 유명 대학의 학위복 대열이 장관이었다. 록씨의 연설도 좋았다.” 중 교육에 ..

미 ‘석유 황제’ 록펠러 2세, 청 왕부 사들여 의료기관 설립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5〉 협화의원 기공식에 참석한 록펠러 주니어(앞줄 모자 든 사람). 1917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어느 나라건, 정부의 대외정책은 국가이익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민간활동은 다르다. 정부의 정책과 어긋나도 독립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20세기 이래 미국의 개인이나 교회, 공익재단은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의 교육, 문화, 의료 등 각 분야의 현대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1990년대 초, 상하이의 품위 있는 중국 노부인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백안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세운 학교는 서양 교육기관 취급을 받았다. 학생들은 중국문화를 이해 못 하는 미개인이라며 손가락질당했다. 사실은 다르다. 외국인 학교의 학제는 중국 정부가 제정했다. 전국에 널려있던 교회..

위안스카이, 미국 주중공사를 고문에 앉혀 일본 견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4〉 청나라 말기 즈리(直隸)총독 위안스카이(앞줄 왼쪽 다섯째)는 미국 서적 번역에 관심이 많았다. 영어 번역관을 자주 찾았다. [사진 김명호] 20세기 초, 청(淸) 황실은 썩은 고목이었다. 서구열강은 중국의 주권과 황실의 보존을 담보로 이익만 챙기면 그뿐이었다. 프랑스는 서남(西南), 영국은 장시(江西)와 저장(浙江), 러시아는 둥베이(東北) 지역의 굵직한 이권을 독점했다. 미국의 중국 진출은 한발 늦었다. “다 같이 먹고 살자”며 중국에 문호개방을 요구했다. 당시 중국은 개방상태였다. 미국이 겨냥한 곳은 중국이 아닌 서구열강이었다. 열강은 자신들의 세력범위에 빗장을 걸었다. 미국의 입질을 허용하지 않았다. 윌슨, 중립 내세우며 위안 혁명 지원 정치학회장 출..

량청, 미 장관 집무실서 배수진 치고 배상금 반환 협상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3〉 1908년 시카고를 방문한 우팅팡. [사진 김명호] 19세기 말, 중국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끓었다. 시골 촌구석 어딜 가도 없는 곳이 없었다. 알코올 중독자나 상습 도박꾼 등 엉터리들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관심 분야도 다양했다. 1872년 미국 기독교공리회가 파견한 스미스는 중국인의 성격과 소질에 관심이 많았다. 산둥(山東)성 서부 궁핍한 지역에 초·중 교육기관과 병원 설립하고 노동자와 농민만 상대했다. 중 파견 미 선교사 스미스도 지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서신 보내 미, 마침내 1160만 달러 반환 통보 량의 후임 중 1호 해외박사 우팅팡 매년 중 학생 100명 미 유학 제안 중, 칭화학당 만들어 유학생 모집 황하 ..

량청, 의화단 사건 배상금 반환 대미 협상서 ‘묘수’ 제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2〉 미국 여류화가 캐서린 칼이 그린 즈시의 초상. [사진 김명호] 1904년 말, 미 국무장관 존 헤이가 중국 주미공사 량청(梁誠·양성)을 국무부로 불렀다. “미국은 금본위 국가다. 그간 은으로 지급하던 경자년 배상금을 황금으로 지급하기 바란다.” 량은 대통령의 뜻이라고 직감했다.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약육강식을 신봉하는 골수 다윈주의자였다. 뉴욕주 지사와 부통령 시절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국가는 존재할 자격이 없다.” 대통령이 되자 생각을 바꿨다. 영토 침탈보다 국가 이익에 치중했다. “미 유학할 중 청년 양성 위해 쓸 것” 량의 제안, 미 지식인들 사로잡아 뉴욕타임스 등 언론도 중에 우호적 중의 미 철도 운..

청 서태후, 연합군 몰래 의화단에 “서양 귀신 박멸” 지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1〉 의화단 사건 종식 후, 미국과 중국은 왕래가 빈번했다. 1903년, 세인트루이스 엑스포 중국관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중국대표. [사진 김명호] 1900년, 경자년(庚子年) 7월에 시작된 의화단 소멸 작전은 독일과 프랑스가 앞장섰다. 미국은 냉담했다. 독일이 프랑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귀국은 미국 독립전쟁 시절 라파예트가 인솔한 지원병을 파견했다. 미국의 참여를 권할 명분이 있다.” 1900년 7월 2일, 프랑스가 미국에 제의했다. “외국인의 안전과 질서 회복을 위해, 중국에 주둔 중인 각국 군대의 연합행동이 필요하다.” 미 국무장관 존 헤이는 철저한 개방주의자였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8개국이 중국의 문호개방을 ..

중 의화단 진압한 연합군, 만행 일삼았지만 미군은 자제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0〉 베이징 입성 후인 1900년 가을, 만리장성 유람을 즐기는 미 해군 육전 대원과 대사관 직원. [사진 김명호] 2천여 년 전, 찬란한 거성(巨星)의 출현에 동방의 현인 3명이 넋을 잃었다. 별이 지시하는 새로운 종교(기독교)의 탄생지를 찾았다. 훗날 기독교는 서구의 생활과 정신세계에 확고한 지위를 점했다. 평화와 인애를 종지로, 누가 오른뺨 때리면 왼쪽도 내주라고 신도들에게 강조했다. 신자들은 고난과 좌절이 그치지 않았다. 로마 맹수의 위협과 이교도의 학대를 감내하며 신앙을 전파했다. 당나라 초기, 기독교는 중국까지 흘러들어왔다. 당 태종이 경교사(景敎寺)라는 절까지 지어줬지만, 중국인들을 제대로 빨아들이지 못했다. 다시 몇백 년이 흘렀다. 17세기 중엽,..

미 주중 공사 벌링게임, 공정외교로 양국 우호에 기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9〉 미국 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에게 중국 황제의 국서를 전달하는 벌링게임. 1868년 6월 6일, 백악관. [사진 김명호] 중국의 대외정책은 변덕이 심했다. 해금(海禁)과 개방을 반복했다. 청 제국 4대 황제 강희(康熙)는 해금을 느슨히 했다.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 스싼항(十三行)을 출범시켰다. 국가 전매였던 소금 밀매로 부를 축적한 양저우(揚州)의 염상(鹽商)집단과 수백 년간 봇짐장사로 전국의 은을 긁어모은 산시(山西)의 상단(商團)도 해외무역에 뛰어들었다. 베이징 주재 6년간 중 환심 얻어 청나라 서태후, 흠차대신에 임명 미·중 첫 평등조약 체결에 공헌 아편전쟁 군비 댄 거상 우빙젠 19세기 중엽 세계 최고 부호 돼 반관반상(半官半商)이던 스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