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304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05> 心上功夫

- 마음 심(心-0)위 상(一-2)일 공(力-3)도울 부(大-1) 세종은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경연을 열었다. 경연은 왕이 경륜이 많거나 학식이 풍부한 신하들과 經書(경서)를 강론하면서 정책을 토론하는 제도다. 세종은 경연의 첫 번째 교재로 ‘대학연의’를 선택했다. ‘대학연의’는 송나라 때 眞德秀(진덕수, 1178∼1235)가 편찬한 책으로, ‘대학’의 체제를 빌려서 역사적 사례들을 풍부하게 덧붙여 대폭 보완하고 새롭게 정리한 정치서다. 이 ‘대학연의’의 특색은 공부의 주체를 군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볼 때, 군주가 어떤 인물이며 그가 어떻게 했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었으며, 또 어떤 인재들을 발탁해서 썼느냐에 따라 정치의 성패가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학’의 본령을..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04> 大學衍義

- 클 대(大-0)배울 학(子-13)펼 연(行-3)뜻 의(羊-7) ‘대학’은 修身(수신)·齊家(제가)·治國(치국)·平天下(평천하)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수신과 제가다. 흔히 간과하는 정치의 주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부 항목으로 格物(격물)·致知(치지)·誠意(성의)·正心(정심)을 자세하게 논한 것도 정치나 통치의 주체야말로 그 성패의 관건이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치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긴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시민 또는 국민이 바로 정치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주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이가 조선의 세종이었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7일의 실록에 나온다. 처음으로 經..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03> 不以利爲利

- 아닐 불(一-3)써 이(人-3)이로울 리(刀-5)생각할 위(爪-8) 상홍양이 추진한 정책은 기본적으로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이를 위해서 시행한 것이 소금과 철, 술의 국가 전매였다. 즉, 민간에서 생산하고 판매하던 주요 물산을 국가가 독점한 것이었다. 이 정책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 능력 있는 상인들을 鹽官(염관)과 鐵官(철관)으로 대거 기용했고, 한편 사사로이 철기를 주조하거나 소금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단속했다. 정부의 재정 수입이 증가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전매 제도의 실시 등은 백성에게 무거운 과세 부담을 안겨주었다. 백성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는 무제 사후에 소집된 염철 회의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 회의는 大夫(대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02> 桑弘羊

성 상(木-6)넓을 홍(弓-2)양 양(羊-0) 匈奴(흉노)는 한나라로서는 골칫거리였다. 북방 초원 지대에서 사냥과 목축을 일삼던 부족인데, 식량이 부족하면 자주 남쪽으로 내려와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한나라 때 흉노는 워낙 강성해 文帝(문제)와 景帝(경제)도 화친을 맺고 다량의 물자를 보내 달래면서 침략에 대비하는 소극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무제는 더 이상 흉노에 끌려다니기 싫었다. 기원전 133년, 王恢(왕회)를 시켜 馬邑(마읍)에 병사 30만 명을 숨겨두고 흉노를 유인하여 격파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흉노 쪽에서 그 계략을 알아채는 바람에 허사가 되었고, 흉노는 이내 화친을 끊고 북방 지역을 침략했다. 이로써 한나라와 흉노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무제가 추진한 흉노와 전쟁은 단순한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01> 人之所惡

사람 인(人-0)의 지(丿-3)바 소(戶-4)싫어할 오(心-8) ‘순자’ ‘강국’의 글(300회)은 이런 뜻이다. “대체 걸왕과 주왕은 어찌하여 천하를 잃었고, 탕왕과 무왕은 어떻게 천하를 얻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걸왕과 주왕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잘했고, 탕왕과 무왕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더럽게 속이고 서로 다투고 빼앗으며 이익을 탐내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예의와 사양과 참됨과 미쁨이다.” 漢武帝(한무제, 기원전 141∼87 재위)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영토를 확장하여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 교역의 길을 활짝 열었던 황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무제가 ‘人之所好’(인지소호) 곧 “백성들이 좋아하는 ..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00> 榮夷公

성 영(木-10)평평할 이(大-3)어른 공(八-2) 예량부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래서 ‘시경’ ‘周頌(주송)’의 에서 이르기를, ‘덕이 넘치는 후직이여! 저 하늘과 참으로 짝을 이룰 만하구나. 우리 백성을 두루 잘 살게 하시니, 그를 본받지 않는 사람 없다네!’라고 하였고, ‘大雅(대아)’의 에서도 ‘은혜와 이익을 베푸시니, 주나라가 발전한다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익은 두루 나누고 재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나라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이제 왕께서 이익을 혼자 차지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필부가 이익을 독차지해도 도적이라 부르거늘, 왕이 그리하면 왕을 따르는 사람이 적어집니다. 榮夷公(영이공)을 기용하시면 주나라는 틀림없이 낭패를 볼 것입니다.” 여왕..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99> 芮良夫

성예(艸-4)어질 량(艮-1)사내 부(大-1) 遷都(천도)한 뒤로 주 왕실은 쇠퇴했고, 그때부터 제후들은 주 왕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강성한 제후가 정권을 쥐어 覇者(패자)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왕조의 봉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자가 말한 禮樂(예악)의 붕괴가 진행되었던 것인데, 예악은 바로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의 제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이 시기를 春秋時代(춘추시대, 기원전 770∼403)라 한다. 그리고 다시 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221)를 거쳐 기원전 249년에 秦(진)나라의 莊襄王(장양왕)이 주 왕실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오던 東周(동주)를 멸망시키면서 거의 800년을 지탱해온 주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체로 幽王(유왕) 때에 주 왕조가..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98> 務財用者

힘쓸 무(力-9)재물 재(貝-3)쓸 용(用-0)사람 자(老-5) 周(주) 왕조는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제후들에게 영토를 분봉하여 각기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封建制(봉건제)를 썼다. 제후들은 다시 경대부들에게 일정한 영지를 분봉하여 집안을 이루게 했다. 제후나 경대부는 분봉 받은 땅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백성까지 아울러 소유했다. 그렇지만 백성이 생산한 것까지 무한정 소유해서는 안 되고 알맞게 세금을 매겨서 거두어야 했다. 따라서 ‘長國家而務財用者’(장국가이무재용자) 곧 “나라나 집안의 어른이 되어서 재물을 모으고 쓰는 데 힘쓰는 자”라고 한 말은 자신의 영지 내에 거주하는 백성에게서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어들여 백성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드는 자라는 뜻이다. 가령 전국시대 제나라의 孟嘗君..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97> 斂財侈費

긁어모을 렴(攴-13)재물 재(貝-3)사치할 치(人-6)쓸 비(貝-5) 황제가 교만하고 방탕해 조정이 무너졌으니, 지방의 절도사들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양귀비의 사촌 오빠인 楊國忠(양국충)이 정권을 농단하고 安祿山(안록산)과 史思明(사사명)의 난이 일어난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저 ‘개원의 치’가 허망하게 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대한 당 제국조차 그로부터 몰락과 쇠망의 길을 걸었다. 후대 사람은 현종을 두고 ‘斂財侈費’(염재치비) 곧 “재물을 긁어모으고 사치를 일삼았다”고 짤막하게 평했다. 한 인물의 생애와 행적을 간단한 문구로 다 드러낼 수는 없으나, 이 넉 자가 현종의 재위 후반기를 적실하게 잘 나타내는 글자임은 분명하다. 이제 ‘대학’의 마지막 구절인 16-2가 이어지는데, 저 현종의..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96> 得寶歌

- 얻을 득(彳-8)보배 보(宀-17)노래 가(欠-10) 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에 최성보가 새로 가사를 지어 붙인 노래다. 개원 29년(741년)에 陝州(섬주) 桃林縣(도림현)에서, 弘農(홍농) 교외에서 일종의 부적인 寶符(보부)가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이는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보고를 올렸다. 이에 도림을 靈寶(영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견은 이런 상서로운 일이 있어 못을 파 준공했다며 여론을 조작하고는 최성보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던 것이다. 왕홍은 왕홍대로 위견에 뒤질세라 해마다 정기적으로 거두는 세금 외에 돈과 비단 수백 만금을 모아 바쳤으며, 이를 따로 內庫(내고)에 갈무리해두었다가 오로지 궁중에서 상품이나 하사품으로만 쓰도록 했다. 현종은 그 모든 재물이 위견과 왕홍이 백성을 쥐어짜서 가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