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26

백의종군 딛고 선 충무공, 오늘날 국론분열 꾸짖는 듯

백의종군 딛고 선 충무공, 오늘날 국론분열 꾸짖는 듯 중앙일보 입력 2021.12.31 00:18 세밑에 돌아보는 이순신 리더십 파란의 2021년이 막을 내린다. 불 밝힌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새해에 대한 희망을 찾아본다. [중앙포토] “지난번 경을 파직시켜 죄를 처벌하게 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좋지 못했기 때문인데 끝내는 오늘 패전의 치욕을 불렀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지금 상중(喪中)에 있는 경을 특별히 일으켜 백의(白衣)에서 발탁하여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하노라. 경이 도착하는 날 먼저 사람들을 불러 다독이고 흩어진 자들을 찾아내고 해영(海營)을 만들어 적을 누를 형세를 이뤄 군성(軍聲)을 진동시키면 이미 흩어진 민심을 다시 편안하게 ..

인조는 오군, 최명길은 간신으로 본 ‘오랑캐’ 이데올로기

조선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 조선 후기 화가 김윤겸의 ‘청나라 병사 그림(胡兵圖)’. 청나라 병사 두 명을 실제보다 나이 들게 그리며 희화화한 느낌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신이 생각하기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오랑캐의 성품은 몹시 탐욕스러운데 피난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절대로 침탈하지 않고 또 그들의 대오(隊伍)도 아주 정제돼 있습니다. 전마(戰馬)는 멀리서 왔음에도 조금도 피곤해 보이지 않으니 몹시 괴이쩍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건대 흉악하고 간특함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청나라 군대 정돈된 모습에 충격 조선 조정이 병자호란을 맞아 포위된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1636년 12월 15일, 호조참판 윤휘(尹暉·1571~1644)가 인조에게 아뢰었던 내용이다...

맥아더가 해산한 일본군, 동아시아 ‘태풍의 눈’으로

맥아더가 해산한 일본군, 동아시아 ‘태풍의 눈’으로 중앙일보 입력 2021.12.03 00:28 역사 속 3차례 일본인 무장해제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도쿄항에 정박 중인 미 태평양 함대 소속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1587년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일본의 패권을 차지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본래 미천한 출신이었다. 소년 시절 가출하여 바늘 행상 등을 하며 각지를 떠돌던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기면서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출셋길에 들어선다. 1582년 노부나가가 가신(家臣) 아게지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에 휘말려 자살하자 히데요시는 곧바로 미쓰히데를 응징한 뒤 경쟁자들을 잇달아 제거하고 주군 자리에 올랐다. ..

아편전쟁 지켜본 일본 “중국은 온몸이 병든 환자”

일본, 언제부터 중국을 싫어하게 됐나 아편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1월 영국 동인도회사가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호(그림 오른쪽)가 청나라 범선들을 공격하고 있다. 일본은 아편 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선망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진 글항아리] 개황(開皇) 20년,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이 궁궐에 찾아왔다. 황제는 담당 관리를 시켜 그 나라의 풍속을 묻도록 했다. 사신은 “왜왕은 하늘(天)을 형으로 여기고 해(日)를 아우로 여겨 날이 밝기 전에 나와 정무를 보는데, 정좌하다가 해가 뜨면 문득 정무 보는 것을 그만두고 ‘나의 아우에게 맡긴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고조(高祖)는 “이것은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며 가르쳐서 고치도록 했다. 600년 왜국이 중국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을 때 벌..

명 마지막 황제 숭정제, 환관의 혀에 나라를 잃다

위기의 시대, 지도자의 안목 1626년 명나라 장수 원숭환이 후금 누르하치의 침략을 격퇴했던 영원성(寧遠城). 원숭환은 이 전투를 계기로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음력 1619년 3월, 명과 조선의 연합군을 물리친 이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곧이어 개원(開原), 철령(鐵嶺), 요양(遼陽), 심양(瀋陽) 등을 잇따라 무너뜨려 요동을 장악하더니 1622년에는 광녕(廣寧)까지 함락시킨다. 후금군은 이제 금주(錦州), 영원(寧遠)은 물론 북경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까지 응시하고 있었다. 공포에 빠진 명은 산해관을 지키는 데 모든 것을 걸기로 하고 그 바깥의 방어는 사실상 포기한다는 작전을 세운다.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이끄는 엄당(奄黨·환관당)의 입김이 반영된 국방 대..

조선의 아킬레스건 왜관 ‘일본엔 낙토, 조선엔 종기’

조선의 아킬레스건 왜관 ‘일본엔 낙토, 조선엔 종기’ 중앙일보 입력 2021.10.22 00:31 조선은 왜 왜관을 허용했나 조선 후기 화가 변박이 1783년 초량왜관을 그린 ‘왜관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에 포함됐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동래 왜관(倭館)은 부산진(釜山鎭) 아래에 있어 우리 수군의 허실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또 물자를 교역할 때 기강이 엄하지 않고 금령(禁令)이 해이하여 왜인과 아국인의 출입이 무상합니다. 왜인 가운데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자가 매우 많아 우리나라 사정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조리 탐지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변방의 방어가 튼튼하지 못하고 방어의 금령이 주밀(綢密)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처럼 심했던 적은 없..

“조선혼 어디갔나” 500년 짝사랑 통탄한 권덕규

“조선혼 어디갔나” 500년 짝사랑 통탄한 권덕규 중앙일보 입력 2021.10.08 00:31 조선 지식인의 사대 의식 “무슨 운인지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금의 이익은 있을 법하되 커다란 해를 끼친 명나라 원병이 다녀가자 찰거머리 같은 모화(慕華)의 신(神)은 이내 떠나지 아니하여 (…) 명이 망하고 그 말왕(末王)이 순국하매 의자왕(義慈王)의 제사는 궐(闕)하면서 북지왕(北地王) 심(諶)은 높여도 신라 왕자 전(佺)은 모르는 그들이 (…) 만동묘(萬東廟)라는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한 칸 모우(茅宇)에 받들어 제사하니 이날은 조상을 잊고 조선 혼(魂)을 닦아내 버리는 수업 일이라, 그만 조선인은 보기 좋게 곯아 죽었도다.” 조선 지식인, 한족왕조 숭앙의식 각별 조선 후기 충북 괴산에 세운 사당 만동..

노·소론 충돌한 그때, 인삼 찾아 조선 땅 뒤진 일본

노·소론 충돌한 그때, 인삼 찾아 조선 땅 뒤진 일본 중앙일보 입력 2021.09.24 00:18 지면보기지면 정보 조선의 ‘캐시 카우’ 인삼 ① 일본 규슈박물관에 있는 인형 인삼과 관련 문서. 18세기 초반 부산 왜관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② 대마도가 조선에서 수입한 인삼을 다시 일본 본토에 판매한 사정을 기록한 ‘인삼시종각서(人參始終覺書)’. [사진 부산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요즘 인삼이 은만큼 귀해서 장사꾼이 몰려듭니다. 함경도 산들은 평소 삼이 난다고 알려졌으니 백성에게 생업으로 채취하게 하면 온갖 재화가 모여 삶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관이 인삼에 세금을 너무 많이 매겨 산에 들어간 백성이 두려워서 삼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 여진인은 우리나라에 ..

명과 후금 사이 중립외교, 내정 실패로 무너졌다

명과 후금 사이 중립외교, 내정 실패로 무너졌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10 00:32 광해군의 두 얼굴 광해군은 국정 운영을 놓고 신료들과 충돌하며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병헌이 주연 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1619년 12월, 광해군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1569∼1626)과 면담했다. 찬획사란 후금(後金·청)의 위협에 대비하여 군사·외교 대책을 기획하는 막중한 직책이었다. 이시발은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일본은 같은 하늘을 쳐다보고 살 수 없는 원수(怨讐)입니다만 우리나라는 지금 그들에게 기미책(羈縻策·포용하여 다독이는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하물며 저 후금과는 대대로 원수진 일도 없고 불..

명군에 결전 호소한 선조 “아니면 일본에 항복할 것”

명군에 결전 호소한 선조 “아니면 일본에 항복할 것” 중앙일보 입력 2021.08.27 00:34 임진왜란의 치욕 대하드라마 ‘징비록’(2015)은 류성룡의 동명 저술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전후를 조명했다. 드라마에선 배우 김태우가 선조 임금을 연기했다. 전쟁을 맞아 선조가 보인 행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된다. [화면 캡처] 1593년(선조 26) 1월 말, 명군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조선의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 경기도 관찰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개성에 있던 자신의 군진으로 호출한다. 이여송은 류성룡 등 조선 신료들을 무릎 꿇린 뒤 군법을 집행하겠다고 길길이 뛰었다. 류성룡 등이 군량 조달과 공급을 태만히 하여 명군 장병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