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47

국화꽃 망념

Opinion :마음 읽기 국화꽃 망념 중앙일보 입력 2022.10.12 00:20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법당을 장식한 꽃이 며칠 못 가 금세 시들해졌다. 도량 가득한 국화 향기에 기(氣)가 눌린 것일까. 관상용 꽃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역시 가을 국화의 풍미에는 비할 바가 못 되는가 보다. 조석으로 꽃잎을 여닫던 청초한 연꽃이 지더니, 어느새 찬 서리 맞고도 기죽지 않을 국화가 피었다. 그 옛날 다산 선생은 ‘해마다 국화 분 수십 개를 길러 여름에는 잎을 보고 가을에는 꽃을 감상하고, 낮에는 자태를 밤에는 그림자를 사랑했다’(『국영시서』)던데, 나 또한 이 작은 암자에 색색의 국화를 들여놓았다. 정인보와 서정주의 시도 곁들여 써두었다. 법당 계단에 낮게 걸터앉아 소담한 국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옛 시..

마음 읽기 2022.10.12

현재를 쓰는 감각

현재를 쓰는 감각 중앙일보 입력 2022.07.27 00:22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요근래 서점가에 회고적 에세이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마이너 필링스』 『H마트에서 울다』 『사나운 애착』 등 번역서가 많았는데, 이들 작가가 자기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자발적이라기보다 비자발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봐야 할지 모른다. 보통 자서전을 쓰겠다는 결심은 국가사와 사회사에 내 삶의 지류를 삽입시켜 거대한 파고를 어떻게 헤쳐왔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회고적 에세이는 반대로 내 의도대로 써지는 것이 아니며, 결과물이 얻어내는 것은 고작 기억과의 투쟁 속에서 조금 확장된 인식의 지평 정도다. 회고는 재의미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을 겪었던 당시와, 생배추처럼 날것의 재료를 소금물에 담가 숨죽이는 작업을 하..

마음 읽기 2022.07.27

잠시 쉬었다 가렴

잠시 쉬었다 가렴 중앙일보 입력 2022.07.20 00:22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남녘은 가물다고 하던데, 서울은 장마에 온종일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의를 걸치고 비 새는 곳은 없는지 조그만 도량(道場)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아이고 이런, 작년 여름에는 무탈하게 넘어갔던 처마 이음새가 이번 폭우에는 못 견디고 내려앉았나 보다. 빗물이 들이쳐 창고 벽과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다. ‘법당이 아니길 천만 다행이네’ 싶으면서도 숨이 턱에 받치자 한숨이 났다. 지붕이 샐 뿐인데, 수리하면 그만인데, 이게 뭐라고 마치 내 인생이라도 찢어져 새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한 것일까. 순식간에 옷이 푹 젖었다. 끈적끈적한 습기가 온몸에 가득하다. 그렇게 쏟아지던 장맛비는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거무스름한 밤하늘만 남기고 이..

마음 읽기 2022.07.20

불볕더위 여름날을 살며

불볕더위 여름날을 살며 중앙일보 입력 2022.07.13 00:26 문태준 시인. 아주 짧게 소나기가 내리지만 연일 폭염이다. 소나기가 내린 후에는 대지의 푸석푸석한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도는 듯도 하지만 다시 강렬한 햇볕이 내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대지도 가물고 대지 위에 자라는 생명들도 몸의 물기가 바싹 마른다. 어디 몸의 물기만 마르겠는가. 대지가 가물면 사람의 인심도 박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유정과 무정의 존재들은 서로 자매이며 형제인 까닭이다. 여름의 길섶과 들에는 개망초가 피었다. 어릴 적에 여름날 오후가 되면 소에게 풀을 먹이러 들길을 가던 날이 잦았는데, 그런 여름날에도 개망초가 하얗게 피어 있던 기억이 꽤 또렷하다. 언제가 나는 개망초의 활짝 핌에 대해 ‘개망초가 피었다 공중에 뜬/ ..

마음 읽기 2022.07.13

마음도 샤워하는 시간이 필요해

마음도 샤워하는 시간이 필요해 중앙일보 입력 2022.07.12 00:30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학 교수 햇살은 뜨겁고 바람 한 점 없다. 서둘러 선실의 갈색 좌복들을 모두 담벼락에 내어 말린다. 좌선하는 방석은 두텁고 까슬까슬하니 풀 먹인 듯해야 좋다. 감물들인 옷을 갈옷이라 하는데, 제주에서는 여름이면 이 옷을 많이 입는다. 옷감이 몸에 달라붙지도 않고 땀 냄새도 없으며 항균효과는 물론 전자파까지 막아준단다. 서문시장 오래된 갈옷집 딸이 몇 년 전 참선수행을 한 인연으로 출가를 했는데, 미안한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으로 그 집을 찾았다. 평생을 갈옷 만들어온 노모와 디자인 전공으로 호주 유학을 다녀온 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어디에서든 참선에 필요한 도구들이 보이면 기쁘다. 마침 알맞은 크기의 참선..

마음 읽기 2022.07.12

자기착취 사회와 분별력

자기착취 사회와 분별력 중앙일보 입력 2022.07.06 00:24 장강명 소설가 덴마크에 ‘게으른 로베르트’라고 불리는 사내가 산다. 본명은 로베르트 닐센. 대학을 다녔으며 사지도 멀쩡한데,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해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 10년 넘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살았다는 사람이다. 맥도날드에서 취업한 적이 있는데, 업무량이 과도하다 느껴 그만뒀단다. 로베르트는 TV 토크쇼에 나와 유명해졌다. 그는 당당했다. 자신은 덴마크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거라고. 사람이 왜 꼭 일을 해야 하느냐고. 이후 덴마크에서는 복지 정책 축소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다. 로베르트는 제도를 고치겠다는 총리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각자도생과 플랫폼 경제의 시대 자기 자신이 가장 큰 적이 됐다 느낌과 욕망에..

마음 읽기 2022.07.06

삶에도 나침판이 필요하다

삶에도 나침판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2022.06.14 00:28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학 교수 숲길을 걷는다. 파란 하늘빛 산 수국이 곳곳에 피었다. 한라산 생태 숲길은 진녹색 빛깔이다. 제주는 유월 초부터 장마권에 든다는 것을 나무들이 더 빨리 아는 것 같다. 간간이 비추는 햇살을 만끽하며 숲길을 걷는다. 얼마 전부터 하루 두 시간 좌선하는 시간을 걷는 시간으로 바꾸었다. 내 몸에 침습한 병마의 기운을 털어내려 좌복에 앉는 시간을 줄인 것인데,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지난겨울을 태백산 구마동 골짜기에 자리한 토굴(작은 수행처)에서 보내고 봄이 되어 산을 내려왔다. 그동안 갚지 못한 밥값을 할 요량으로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다가 덜컥 병이 났다. 39~40도를 오가는 고열에 온몸이 뒤틀렸지만, 화두를..

마음 읽기 2022.06.14

실력은 디테일에 있다

실력은 디테일에 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6.08 00:26 장강명 소설가 근대 건축의 거장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로 알려진 명언이 있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가 대표적이다. 미스도 아마 이 말을 했을 것 같지만, 처음으로 한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가 태어나기 전인 1855년에 로버트 브라우닝이 발표한 시에 이미 같은 구절이 있다고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말도 비슷하다. 뉴욕타임스가 미스의 부고 기사를 쓰면서 그의 발언으로 소개해 유명해진 경구이기는 하다. 하지만 독일의 문화이론가 아비 바르부르크가 같은 말을 먼저 했다는 설도 있고, 구스타브 플로베르·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슷한 표현을 훨씬 전..

마음 읽기 2022.06.08

독자는 까다롭다

독자는 까다롭다 중앙일보 입력 2022.06.01 00:20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독자는 까다롭다. 책을 구입할 때는 관대한 독자인 나만 해도 막상 읽으려 하면 사둔 책의 30%만 마음에 들고, 나머지는 구입 당시의 호기심이 사그라들어 시간을 들이기가 꺼려진다. 특히 한 책을 완독하고 다음 책으로 건너가는 데는 에너지가 꽤 든다. 이전 책이 흔들어놓은 인식의 지층, 휘저은 감정, 문장의 결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이 그랬다. 작가는 규모 있게 제1, 2차 세계대전을 동시에 다루면서 일상이 전쟁터가 되는 인생들을 보여준다. 특히 한 여성은 러시아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강간당하는 몸이 되고, 자폐 성향이 있던 한 남성은 전쟁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무신..

마음 읽기 2022.06.01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선택한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선택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2.05.31 00:22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우리가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를 택함으로써 바로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들 말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다면 선택이 아니라 축복이니까. 선택이 고통이 되는 것은 하나를 택한 기쁨보다는 하나를 버려야 하는 아쉬움과 상실감이 언제나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것을 선택하던 그 결과는 또다시 후회와 미련을 품은 고통의 단초가 된다. 그렇게 결정을 향한 통과의례에는 갈등을 품은 선택의 고통스러움이 잠재해 있다. 사랑과 우정 사이,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매몰찬 가족의 반대처럼 어쩌면 소소하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

마음 읽기 2022.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