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23

“우물과 불씨 끊는다” 규약 어기면 마을서 쫓겨나

Opinion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우물과 불씨 끊는다” 규약 어기면 마을서 쫓겨나 중앙일보 입력 2022.10.14 00:31 지면보기 농촌 마을은 어떻게 운영됐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과거의 마을에 대해 낭만적인 감정이 있다. 포도, 사과, 닭서리까지 범죄가 아니었던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귀염 속에 친구들과 지칠 줄 모르고 놀았다. 학원은커녕 방학숙제조차 하지 않아도 됐던 정녕 자유의 하루하루. 구수한 여물 냄새에 이어 짚불에서 끓는 청국장 내음, 그리고 소 뜯기던 들판과 똥개인 똘똘이가 뛰노는 타작 마당. 그 마당에선 면장 할아버지가 잡아 온 뜸부기를 안주로 할아버지께서 기분 좋게 한잔하시곤 했다. 겨울이면 사랑채 고드름 녹는 물이 떨어지는 처마 안쪽 툇마루와 섬돌에 ..

오항녕의 조선 2022.10.15

삶의 중심은 동네, 하지만 한 곳에 붙어살진 않았다

Opinion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삶의 중심은 동네, 하지만 한 곳에 붙어살진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2022.09.16 00:56 지면보기 얼마나 자주 옮겨 살았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80장에 보면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줄여라. 백성들이 죽음을 소중히 여겨 멀리 이사 가지 않고, 배나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게 하라. 이웃 나라가 바라보이는 데 있어 닭이나 개소리가 들리더라도 백성들이 평생 왕래하지 않는다” 했다. 이 유명한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 때문이었는지 나는 어느덧 조선 사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노자의 말은 실제 국가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작은 나라여야 전쟁도 범죄도 적고 백성들이 편안하리라는 규범적인 비전..

오항녕의 조선 2022.10.15

벼·보리는 기본, 모밀·수박·담배 등 40여 종 키워

Opinion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벼·보리는 기본, 모밀·수박·담배 등 40여 종 키워 중앙일보 입력 2022.08.19 00:41 지면보기 19세기 예천 농부 박득녕의 365일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어릴 적 내가 자란 시골 외갓집의 여름 밥상은 으레 다음과 같았다. 감자와 풋고추, 우렁이 들어간 된장찌개, 상추·호박이나 비름 혹은 가지 볶음, 노각이나 미나리 무침, 오이냉국이나 젓국 혹은 토란국, 마늘이나 무장아찌. 거기에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 냇가에서 잡아 온 각종 물고기 조림이 더해질 수 있었다. 어쩌다 닭이나 돼지고기도 올랐다. 대부분 텃밭이나 들판, 그러니까 집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였다. 간식으로는 콩, 옥수수, 말린 붕어 구운 것, 미꾸라지나 개구..

오항녕의 조선 2022.10.15

사대부도 노자·장자 정도는 달달 외웠다

사대부도 노자·장자 정도는 달달 외웠다 중앙일보 입력 2022.07.22 00:22 업데이트 2022.07.22 00:59 업데이트 정보 더보기 유(儒)·불(佛)·도(道)가 스며든 삶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한때 조선시대를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계라고 비난하면서, 불교나 도교가 절멸됐다고 서술하곤 했다.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경직된 성리학의 시대’로 알려졌던 17~18세기에 불교 사찰이 가장 많이 중건됐으며, 유학자들이 도교 제사와 결합한 제사를 수행하고 정리했던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중앙일보 2021년 5월 28일자 24면〉 최근 K의 논문을 보니 조선 사상계에서는 『노자』를 읽고 연구하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몰려 멸문의 화를 자초할 수도 있었다고 나와 있다. 박세당(朴世堂)이 『신주도..

오항녕의 조선 2022.07.22

일제강점기 초등 교과서 “조선의 진짜 적은 명나라”

일제강점기 초등 교과서 “조선의 진짜 적은 명나라” 중앙일보 입력 2022.06.24 00:28 업데이트 2022.06.24 00:32 왜란·호란 왜곡한 식민주의 역사관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울타리 밑에서 어린아이가 어미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제 저녁 그 어미가 버리고 갔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죽을 테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나도 머지않아 구덩이를 메우겠지. (…) 거지가 매우 드물다. 다 굶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은데, 육촌 친척을 죽여서 먹기까지 했단다. 이러다 가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겠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임진왜란 때 피난 일기 『쇄미록(瑣尾錄)』에 나오는 참상이다. 건국 200년이 지나면..

오항녕의 조선 2022.06.25

과거는 유교국가 떠받치는 인재풀, 조선판 능력주의

과거는 유교국가 떠받치는 인재풀, 조선판 능력주의 중앙일보 입력 2022.05.27 00:28 서양엔 없는 과거제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퇴계가 공부는 수양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손에게 보낸 편지에는 과거 공부에 힘쓰라고 했거든. 퇴계도 자식 출세라는 부모 욕심을 벗어나진 못한 거지.” 어떤 동료가 한 말이다. 실제로 퇴계는 조카 영(寗)과 손자 안도(安道)가 합격하자 “안동에서 보내온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고 너희들이 합격했음을 알게 되었다. 요행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고 했다. 동료의 말처럼 퇴계 역시 요즘 부모들이 자식이 고시에 합격하길 바라듯이 자기 자식의 출세를 바라고 과거 합격을 기뻐한 것일까. 과거 합격해야 관직 나갈 수 있어 양반 출신도 정..

오항녕의 조선 2022.06.25

과거시험에서 묻다 “술이 빚는 재앙을 논하라

과거시험에서 묻다 “술이 빚는 재앙을 논하라” 중앙일보 입력 2022.04.29 00:32 업데이트 2022.05.02 07:00 권장과 경계, 술의 두 얼굴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손자가 횡설수설하길래 다그쳐 보니 술을 마셨단다. 말이 거칠고 비틀거렸다. 술이 깰 때를 기다려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를 쳤다.” 조선 명종(明宗) 때 이문건(李文楗)의 『손자 기른 이야기(양아록·養兒錄)』에 나오는 일화다. 13세 된 손자 숙길(나중에 수봉으로 이름 고침)을 데리고 정 생원 집에 갔는데, 돌아올 때 숙길이가 횡설수설하길래 다그쳐보니 술을 마셨던 거다. 이문건은 술이 깰 때를 기다려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를 쳤다. 숙길이는 누이들에게도 10대씩 맞았고, 어머니·할머니에게도 10대씩 맞았으며, 할아버..

오항녕의 조선 2022.06.25

“굳이 귀한 소 잡아 귀신에게 제사 지내나”

유교국가와 미신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천지(天地)신명께서는 감동하시어 한양성 이몽룡을 청운(靑雲)에 높이 올려 내 딸 춘향 살려지이다!” 춘향이 어미 월매가 개울물에 머리 정갈하게 감아 빗고, 정화수(井華水·정안수) 한 동이 바쳐놓고 빌고 있다. 사또 변학도의 수청을 들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을 위한 기도였다. 청운은 과거 급제를 말한다. 어려서 본 ‘춘향전’에서 이몽룡은 이런 월매의 모습을 담 밖에서 보고서 “내가 조상의 덕으로 급제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장모의 덕이었구나”라고 말했다. 정말 이몽룡이 월매의 사위가 됐는지, 사또의 수청을 안 든다고 옥에 넣을 수 있는지, 급제한다고 옥에 갇힌 사람을 빼줄 방도가 생기는지 이러한 의문은 미루어 두자. 월매처럼 도움을..

오항녕의 조선 2022.04.01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호통친 변학도, 그가 몰랐던 것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호통친 변학도, 그가 몰랐던 것 중앙일보 입력 2022.01.07 00:31 형벌, 법치와 문치 사이 조선 후기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 중 하나. 당시 죄인을 다루는 모습을 그렸다. [중앙포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사또 변학도는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에게 근엄하게 꾸짖는다. 수청을 거부했다고 매를 치라는 변 사또의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법적 강제력으로 변환시킨 허위의식 때문에 폭넓은 풍자의 여지를 남겨주었다. 이 말이 딱히 전거(典據)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씨였다. 그리고 이 말씨는 민사(民事)보다 형사(刑事) 사건에서 발견됐다. 이제 형률과 정치사상 두 측면에서 이 말의 함의를 살펴보겠는데, 어디에 저 ..

오항녕의 조선 2022.01.07

금강산 유람이 조선의 로망, 겸재 그림은 선물보따리

사대부들의 여행 겸재 정선이 무르익은 필치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드러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금강산 그림 중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내금강의 전경을 다룬 ‘금강 내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노자(老子)는 “죽을 데를 중하게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게 하며,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다. 이웃 나라끼리 바라다보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의 역사적 배경을 논하는 건 뒤로 미루겠다. 원래 이렇게 크게 이동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건 인류에게 오랜 경험이었다.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땅을 떠나 멀리 나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여비·거리 문제로 여행 기회 적어 글과 그림으로 다른 이들과 공..

오항녕의 조선 2021.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