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198

완곡한 청원[이준식의 한시 한 수]〈199〉

완곡한 청원[이준식의 한시 한 수]〈199〉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2-10 03:00업데이트 2023-02-10 03:14 조정에 못 나간 지 이미 오래, 고향집에 머물며 편안하게 잘 잔다오. 새벽꿈에 아득히 수도까지 갔었는데, 깨어 보니 초승달 걸리고 성 가득 닭 울음소리. 되짚어보니 꿈속 우리의 대화 귓전에 쟁쟁한데, 덧없는 인생 꿈만 같군요. 산도(山濤), 왕융(王戎)처럼 이제 존귀해지신 그대, 대숲 새 울음소리 듣지 않으시려오? (不趁常參久, 安眠向舊溪. 五更千里夢, 殘月一城鷄. 適往言猶在, 浮生理可齊. 山王今已貴, 肯聽竹禽啼.) ―‘꿈에서 깨어 구양수에게 보내다(몽후기구양영숙·夢後寄歐陽永叔)’ 매요신(梅堯臣·1002∼1060) 모친상을 당한 후 관습대로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한..

한 풍류객의 허세[이준식의 한시 한 수]〈198〉

한 풍류객의 허세[이준식의 한시 한 수]〈198〉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2-03 03:00업데이트 2023-02-03 08:23 화려한 대청에서 열리는 오늘 이 성대한 연회, 어느 분이 낙양 감찰어사인 이 몸을 초대하셨나. 갑자기 허튼소리 한마디 했더니 온 좌석이 놀라고 양쪽에 즐비한 미녀들 일제히 나를 돌아보는구나. (華堂今日綺筵開, 誰喚分司御史來. 忽發狂言驚滿坐. 兩行紅粉一時回.) ―‘병부상서의 초대연에서 짓다(병부상서석상작·兵部尚書席上作)’ 두목(杜牧·803∼852) 23세에 ‘아방궁부(阿房宮賦)’를 지어 국가 흥망성쇠의 이치를 설파했던 두목. 시황(始皇)이 통일한 진(秦)이 멸망한 건 사치와 향락에 빠진 조정 탓이지 결코 천하대세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허약한 만당 조정이 이 ..

간곡한 술 유혹[이준식의 한시 한 수]〈197〉

간곡한 술 유혹[이준식의 한시 한 수]〈197〉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1-27 03:00업데이트 2023-01-27 03:20 남쪽 동산 위 작은 정자, 조금씩 산꽃들이 차례로 피고 있으니 내 다정한 친구 웅소부여, 쾌청해도 꼭 오시고 비가 와도 꼭 오시게. 우리 마음껏 술잔을 기울이세. 푸른 이끼 위에 앉더라도 봄옷이 물들까 아까워 마세. 내일 아침 비바람이 지나가겠거니 기다렸다간, 우리가 서로 멀리 헤어지거나 봄날이 아득히 사라질 걸세. (南阜小亭臺, 薄有山花取次開. 寄語多情熊少府, 晴也須來, 雨也須來. 隨意且銜杯, 莫惜春衣坐綠苔. 若待明朝風雨過, 人在天涯, 春在天涯.) ―‘웅소부를 초대하다’(초웅소부·招熊少府)’/‘남향일전매(南鄕一剪梅)’·우집(虞集·1272∼1348) 술로 유혹..

젊은 선비의 자부심[이준식의 한시 한 수]〈196〉

젊은 선비의 자부심[이준식의 한시 한 수]〈196〉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1-20 03:00업데이트 2023-01-20 03:24 대붕은 언젠가 바람과 함께 일어나, 회오리바람 타고 구만리 높이 솟구치리. 바람이 멎어 아래로 내려오면, 날갯짓으로 바닷물도 뒤집을 수 있으리. 사람들은 유별난 내 행동을 보거나, 내가 큰소리치는 걸 듣고 냉소를 보내지만 공자도 후배를 경외할 줄 알았나니, 대장부라면 절대 젊은이를 홀대하지 말진저. (大鵬一日同風起, 扶搖直上九萬里. 假令風歇時下來, 猶能簸卻滄溟水. 世人見我恆殊調, 聞余大言皆冷笑. 宣父猶能畏後生, 丈夫未可輕年少.) ―‘이옹께 올리다(상이옹·上李邕)’ 이백(李白·701∼762) 대붕(大鵬)은 ‘장자(莊子)’에 등장하는 전설 속의 새. 구만리 하..

매화 예찬[이준식의 한시 한 수]〈195〉

매화 예찬[이준식의 한시 한 수]〈195〉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1-13 03:00업데이트 2023-01-13 03:17 꽃 피었다는데 봄은 아직 오지 않았고, 눈 내렸다 하는데 그 향기가 유별나다. 대숲 밖 비스듬히 뻗은 가지, 어느 시골집. 쓸쓸한 초가든 부귀한 고대광실이든, 심은 장소는 서로 다를지라도 꽃이 피는 건 매한가지. ​ 道是花來春未, 道是雪來香異. 竹外一枝斜, 野人家. 冷落竹籬茅舍, 富貴玉堂瓊謝. 兩地不同裁, 一般開. ​ ―‘소군원(昭君怨)·매화(梅花)’ 정역(鄭域·남송 초엽) 이준식의 한시 한 수 자유로운 영혼〈194〉 한 해의 끝자락에서〈193〉 갸륵한 말본새〈192〉 ​ 매화에 대한 시인의 찬사가 나지막하게 이어진다. 애써 과장하지도 도드라진 특징을 과시하는 법도..

자유로운 영혼[이준식의 한시 한 수]〈194〉

자유로운 영혼[이준식의 한시 한 수]〈194〉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1-06 03:00업데이트 2023-01-06 03:16 장생불로의 단약(丹藥)도 짓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리 장사도 하지 않고, 밭갈이 또한 하지 않으리 한가로울 때 산수화 그려 팔지니 세상의 때 묻은 돈은 벌지 않으리 不煉金丹不坐禪 불련금단불좌선 不爲商賈不耕田 불위상고불경전 閑來寫就溪山賣 한래사폭단청매 不使人間造孼錢 불사인간조얼전 ―‘포부를 말하다(언지·言志)’ 당인(唐寅·1470∼1523) 도사도 승려도 되기 싫고 상인이나 농부가 될 뜻도 없다.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거다. 재물 욕심으로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억지를 부리거나 부정도 서슴지 않는 건 헛짓거리일 뿐이다. 무명의 선..

한 해의 끝자락에서[이준식의 한시 한 수]〈193〉

한 해의 끝자락에서[이준식의 한시 한 수]〈193〉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2-30 03:00업데이트 2022-12-30 03:23 하늘 끝에 머무는 나그네들이여, 가벼운 추위인데 뭘 그리 걱정하시오. 봄바람은 머잖아 찾아오리니, 바야흐로 집 동쪽까지 불어왔다오. 寄語天涯客, 輕寒底用愁. 春風來不遠, 只在屋東頭. ​―‘제야, 태원 땅의 극심한 추위(제야태원한심·除夜太原寒甚)’ 우겸(于謙·1398∼1457) ​한 해의 끝자락에서 돌아보는 삶의 모습. 허공에 뜬 풍선처럼 아슬아슬 한 해를 건너온 이들, 거침없이 앞으로만 내달려온 이들, 지루하고 맨숭맨숭한 나날에 지친 이들. 세밑이 되도록 객지를 떠돌아야만 하는 시인의 노스탤지어도 그중의 하나이겠다. 발상이 좀 유별나긴 하지만 씁쓸한 타향살..

갸륵한 말본새[이준식의 한시 한 수]〈192〉

갸륵한 말본새[이준식의 한시 한 수]〈192〉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2-23 03:00업데이트 2022-12-23 03:27 옥을 다듬은 듯 잘생긴 사내 왕정국(王定國)을 늘 부러워했거늘, 마침 하늘이 그에게 온화하고 예쁜 낭자를 내려주었지. 낭랑한 노랫소리 고운 이에서 나와, 바람을 일으키면 눈발이 뜨거운 바다에 날리듯 청량하게 바뀐다고들 말하지. 만릿길 먼 남쪽에서 돌아왔지만 얼굴은 더 젊어 뵈고, 미소 지으면 웃음 속엔 영남 땅 매화 향기 아직도 배어 있네. 영남 땅 살기가 어렵지 않았냐 물으니, ‘제 마음 편한 곳이 바로 제 고향’이라는 뜻밖의 대답. ​常羨人間琢玉郞, 天應乞與點소娘. 盡道淸歌傳晧齒, 風起, 雪飛炎海變淸凉. 萬里歸來顔愈少, 微笑, 笑時猶帶嶺梅香. 試問嶺南應不好,..

훈훈한 다짐[이준식의 한시 한 수]〈191〉

훈훈한 다짐[이준식의 한시 한 수]〈191〉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2-16 03:00업데이트 2022-12-16 03:25 젊어서도 생계 걱정 안 했거늘, 늙어서 그 누가 술값을 아끼랴. 만 냥 들여 산 술 한 말, 마주 보는 우리 나이 일흔에서 삼년 모자라네. 한가로이 술잔 돌리며 고전을 논하는데, 취해서 듣는 맑은 읊조림이 풍악보다 좋구나. 국화 피고 우리집 술이 익으면, 다시금 그대와 함께 느긋하게 취해 보세. ​ 少時猶不憂生計 老後誰能惜酒錢 共把十千沽一斗 相看七十欠三年 閑征雅令窮經史 醉聽淸吟勝管弦 更待菊黃家온熟 共君一醉一陶然 ​―‘유우석과 술을 사다 한가로이 마시고 후일을 기약하다 ​(여몽득고주한음차약후기·與夢得沽酒閑飮且約後期)’ 백거이(白居易·772∼846) ​백거이와 유우석..

파격의 추모[이준식의 한시 한 수]〈190〉

동아일보|오피니언 파격의 추모[이준식의 한시 한 수]〈19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2-09 03:00업데이트 2022-12-09 08:44 기녀를 데리고 동토산에 올라, 슬픔에 잠긴 채 사안(謝安)을 애도하다. 오늘 내 기녀는 꽃처럼 달처럼 이쁘건만, 저 기녀 옛 무덤엔 마른풀만 싸늘하다. 꿈에서 흰 닭을 본 후 세상 뜬 지 삼백 년, 그대에게 술 뿌리니 우리 함께 즐겨 봅시다. 취한 김에 제멋대로 추는 청해무(靑海舞), 자줏빛 비단 모자가 가을바람에 날아간다. 그대는 그대대로 한세상, 나는 나대로 또 한세상. 거대한 물결처럼 흐르는 세월, 새삼 신기해할 게 뭐 있겠소? (攜妓東土山, 悵然悲謝安. 我妓今朝如花月, 他妓古墳荒草寒. 白雞夢後三百歲, 灑酒澆君同所歡. 酣來自作靑海舞, 秋風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