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334

산속에서(山中) / 王勃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산은 모든 계절이 지나가는 정거장이다. 사계절 중에서 정거장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남기는 계절을 꼽으라면 단연 가을일 것이다. 단풍의 고운 빛과 낙엽의 처연함은 정거장을 장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여기에 가을 산을 찾은 사람들의 처경이 혼합되어 각양의 가을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 당(唐)의 시인 왕발(王勃)은 가을 산이라는 정거장에 어떤 그림을 남겨 놓았을까? 山中 / 王勃 長江悲已滯 장강비이체 萬里念將歸 만리념장귀 況屬高風晩 황속고풍만 山山黃葉飛 산산황엽비 긴 강은 슬픔에 젖어 이미 멈칫거리고 만 리 먼 곳에서 장차 돌아갈 것을 염원하네 하물며 가을 바람 불어 하루해가 저물고 산마다 노란 낙엽이 날리는 때라야 ``````````````..

행산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가을은 느낌의 계절이다.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가을은 뭔가를 느끼게 한다. 여름 바람은 제아무리 빨라도 세월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을 바람은 비록 약하더라도 세월을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다. 조선(朝鮮)의 시인 허균(許筠)에게도 가을은 빨리 돌아가는 시계였다. 행산에서(杏山) 遠客愁無睡(원객수무수) 먼 타향 나그네 시름에 젖어 잠 못 이루고 新凉入鬢絲(신량입빈사) 이제 막 차가워진 바람이 귀밑머리로 들어 오네 雁聲天外遠(안성천외원) 기러기 소리 하늘 밖 저 먼 데서 들리고 蟲語夜深悲(충어야심비) 벌레소리는 깊은 밤에 구슬퍼라 勳業時將晩(훈업시장만) 공업을 이루기는 때 장차 늦어지고 魚樵計亦遲(어초계역지) 어부와 나무꾼으로 돌..

국화를 읊다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가을을 대표하는 꽃은 뭐니뭐니해도 국화일 것이다. 거친 산야에도, 소박한 시골집 앞마당에도, 낮은 담장 아래에도, 기품 있는 문사의 창틀 위에도 국화는 어김없이 고매한 빛을 발한다. 예로부터 문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꽃을 꼽으라면 단연 국화가 꼽힐 것이다. 朝鮮의 시인 고의후(高依厚)도 빠지지 않고 국화를 노래한 대열에 끼었다. 국화를 읊다(詠菊) 有花無酒可堪嗟(유화무주가감차) 꽃 있고 술 없으면 어찌 탄식하지 않으랴? 有酒無人亦奈何(유쥬뮤인역내하) 술 있고 사람 없으면 또한 어떠하리오? 世事悠悠不須問(세상유유불수문) 세상 일들은 아득하여 모름지기 물을 것 없으니 看花對酒一長歌(간화대주일장가) 꽃 보며 술 놓고 길게 노래하리라 시인에게 국화는 ..

연꽃과 달밤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피어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뿌리는 비록 진흙에 박혀 있지만, 그 뿌리의 기운에 의지해 피어난 꽃은 진흙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세상에서 가장 깔끔한 모습이 너저분한 진흙 속에서 생기는 것만으로 연꽃은 극적인 존재이기에 충분하다. 또한 연꽃은 무더위에 지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생기가 도는 여름형 꽃으로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는 이만한 게 또 없을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서거정(徐居正)은 한여름 저녁에 만난 연꽃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연꽃 마당에 달이 뜨니(蓮堂月夜) 晩坐陂塘上(만좌피당상) 날 저물어 못 가에 앉으니 荷花未半開(하화미반개) 연꽃은 아직 반..

매미 소리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일 년 사계절 중 가장 청각적인 계절은 여름일 것이다. 여름 중에도 늦여름일 텐데, 주인공은 단연 매미이다. 매미는 목청껏 울어대며 여름의 절정을 알리고 동시에 가을의 도래를 예고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강지덕(姜至德)은 이런 매미 소리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매미 소리(聽秋蟬) 萬木迎秋氣(만목영추기) 모든 나무들이 가을 기운 맞았는데 蟬聲亂夕陽(선성난석양) 매미 소리는 석양에 어지럽게 들리네 沈吟感物性(침음감물성) 마음 깊이 사물의 본성에 대해 읊조리면서 林下獨彷徨(임하독방황) 숲 아래를 빙빙 돌 뿐이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시간적 제약을 안고 살아간다. 사람도 매미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사는 수명의 길이에 차이가 있을 뿐, 나고 죽는 것은 ..

여름 밤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계절마다 밤이 주는 느낌은 다르게 되어 있다. 겨울 밤이 길고 외롭고 차갑다면, 여름 밤은 그 반대일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겨울은 낮에 비해 밤이 더 야박한 대접을 받지만, 여름은 거꾸로이다. 아무래도 밤이 되면 덜 덥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오숙도 여름에는 낮보다 밤을 선호했던 것 같다. 여름밤(夏夜) 庭院何寥落(정원하요락) : 정원은 어찌 이리도 적막한가 繩槳坐夜闌(승장좌야란) : 의자에 앉은 채로 밤이 깊었네 自從天氣熱(자종천기열) : 날이 더워진 뒤로부터 覺月光寒(갱각월광한) : 달빛이 차가움을 다시 느낀다 宿鳥時時出(숙조시시출) : 잘 새는 때때로 나타나고 流螢點點殘(유형점점잔) : 흐르는 반딧불 여기저기로 사라..

여름날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여름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단연 더위일 것이다. 이 더위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더위는 열매와 곡식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은인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더위는 사람들에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삼의당(金三宜堂)에게 여름 더위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여름날(夏日) 日長窓外有薰風(일장창외유훈풍) 해는 길고 창 밖으로 뜨거운 바람 이는데 安石榴花個個紅(안석류화개개홍) 어찌 석류꽃은 가지마다 붉게 피었는지? 莫向門前投瓦石(막향문전투와석) 문밖을 향해 기왓돌을 던지지 말거라 黃鳥只在綠陰中(황조지재녹음중) 이유는 단지 꾀꼬리가 숲 그늘에 있다는 것뿐 시인..

접시꽃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사람들은 봄을 꽃의 계절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여름꽃도 봄꽃 못지않게 다양하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다만 잎새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있어 도드라짐이 덜할 뿐이다. 여름이 열릴 즈음 그 자태를 드러내는 꽃이 있으니 접시꽃이 그것이다. 이 꽃이 언제부터 이 땅에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요즘 초여름에 가장 눈에 띄는 꽃임은 분명하다. 신라(新羅)의 시인 최치원(崔致遠)은 먼 이국 땅인 당(唐)에 유학하면서 접시꽃을 접하고는 깊은 감회에 빠졌다. 접시꽃(蜀葵花 ) 寂寞荒田側(적막황전측) 외지고 묵은 밭 옆에 繁花壓柔枝(번화압유지) 풍성하게 핀 꽃이 여린 가지를 누르네 香經梅雨歇(향경매우헐) 장맛비가 그친 데로 향기가 지나가고 影帶麥風㿲(영대맥..

여름 마당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여름은 장마에, 또 더위에 사람들이 시달리는 계절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가한 때이기도 하다. 바쁜 농사일도 잠시 쉬어 가는 시기이고 사람 만나는 일도 뜸해지는 철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름은 지내기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이율배반적 계절이다. 朝鮮의 시인 南秉哲이 그린 여름은 어느 경우일까? 여름날 짓다(夏日偶吟) 雨聲終日掩柴門 우성종일엄시문 水齧階庭草露根 수설계정초로근 園事近來修幾許 원사근래수기허 櫻桃結子竹生孫 앵도결자죽생손 빗소리 종일이라 사립 닫고 있었더니 물이 뜰 계단에 스며 풀뿌리 드러났네 마당 일 요즘 들어 어찌 됐나 둘러보니 앵두는 아들 낳고 대나무는 손자 봤구려 비 내리는 여름 어느 날, 시인은 온종일 사립문을 걸어 둔 채 문밖에 나서..

비와 산촌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여름이 되면 부쩍 비 내리는 일이 잦아진다. 여름 비는 겨울 눈만큼은 아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격리감을 느끼게 한다. 같은 곳인데도 비 오는 날 찾으면 한결 호젓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唐의 시인 王建은 여름 어느 날 비를 만났는데 그때 마침 이름 모를 산골 마을을 지나던 터였다. 비와 산촌(雨過山村) 雨裏鷄鳴一兩家(우리계명일양가) 빗속에서 한 두 집에 닭이 울고 竹溪村路板橋斜(죽계촌로판교사) 대나무 개울 마을 길에 널빤지 다리 걸쳐 있네 婦姑相喚浴蠶去(부고상환욕잠거)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불러 다정히 누에 씻으러 나가고 閑着中庭梔子花(한착중정치자화) 마당 안에는 한가로이 치자꽃이 피었네 산골 마을 풍광이야 어디든 크게 다를 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