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99

[차현진의 돈과 세상] [100] 최종 대부자

[차현진의 돈과 세상] [100] 최종 대부자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입력 2022.12.07 00:40 영국의 새 총리 리시 수낙은 인도계다. 영국 사회의 비주류라는 점에서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와 비교된다. 디즈레일리는 유대계였으며, 이름(Disraeli)의 앞뒤 철자를 빼면 이스라엘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42세에 총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수낙은 로버트 젠킨슨과 닮은꼴이다. 젠킨슨은 15년을 재임한, 최장수 총리다. 혈기왕성한 탓인지 유난히 전쟁을 많이 치렀다. 1812년 취임 열흘 만에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때 영국군은 식민지에서 이탈한 미국을 혼내주려고 대통령 관저를 불태웠다. 미국인들은 그것을 복구한 다음 흰 페인트를 칠하고 백악관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젠킨슨은 나폴레옹과도 오랫동안 전쟁을..

[차현진의 돈과 세상] [99] 수출의 날

오피니언전문가칼럼 [차현진의 돈과 세상] [99] 수출의 날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입력 2022.11.30 00:10 1946년 1월 발표된 미 군정청의 대외 무역 규칙은 무역을 면허제로 선언했다. 1948년 제정된 헌법(제87조)은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둔다”고 했다. 기술은 없고 물자는 부족하니 수입을 막아야 적자가 줄어든다는, 패배감의 산물이다. 실제로 1950년대가 끝날 때까지 무역수지는 만성 적자였고 수출품의 90%는 농수산물과 지하자원이 차지했다. 수입은 더 한심했다. 우리 정부가 GARIOA, ECA, SEC, CRIK, UNKRA, AID, ICA, PL480 등 온갖 국제기구와 미국 정부부처에서 ‘심청이가 동냥젖 얻어먹듯’ 받아온 원조품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1961년 ..

[차현진의 돈과 세상] [97] 루브르와 청와대

[차현진의 돈과 세상] [97] 루브르와 청와대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입력 2022.11.16 00:00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11월을 기다린다. 프랑스 보졸레 지역의 해포도로 담근 ‘보졸레누보’를 맛보려는 것이다. 그것은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 출시되는데, 그날 내로라하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새 술을 맛보며 떠들썩한 자선 모금 행사를 벌인다. 그 행사는 보통 파리 시내 몽마르트 언덕의 포도밭에서 열린다. 포도밭이라고 해야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당시에는 꽤 컸다. 그 포도밭은 원래 교회가 소유하다가 혁명정부가 빼앗아 국유화했다. 교회는 앙시앵 레짐 즉, 구체제에서 시민을 괴롭힌 기득권 세력이라는 이유였다. 당시 프랑스는 화폐 경제가 무너져서 물물교환 상태였다. 혁명정부는 귀족과..

[차현진의 돈과 세상] [95] 저축의 날

[차현진의 돈과 세상] [95] 저축의 날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입력 2022.11.02 00:40 코로나19 위기든 전쟁이든, 엄청난 재정 적자를 메꾸는 방법은 세 가지다. 세금을 더 걷거나, 국채를 발행하거나, 돈을 찍는 것이다. 돈을 찍는 것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시간을 잠시 늦출 뿐, 나중에는 인플레이션이라는 폭탄을 맞는다. 지금이 그렇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본은 의외로 여유가 있었다. 전쟁 중인데도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권에 차관까지 제공했다. 강제 병합한 조선을 수탈한 결과다. 저축률을 높인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08년 일본 왕은 ‘근검조서’를 통해 국민에게 내핍과 근검절약을 명령했다. 당시 일본은 돈 찍기만큼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서양 따라잡기’를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서양..

[차현진의 돈과 세상] [96] 베를린 장벽

[차현진의 돈과 세상] [96] 베를린 장벽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입력 2022.11.09 00:00 금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광주 시민입니다”라고 선언했다. 1963년 6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베를린의 현지 주민 앞에서 “우리 모두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고 연설했던 것의 오마주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은 넷으로 쪼개져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관리받았다. 다만 화폐는 라이히스마르크화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1948년 초 미국, 영국, 프랑스가 각자의 점령지를 서독으로 통합하고, 새 화폐 도이치마르크화를 도입하기로 했다. 기존 화폐 라이히스마르크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동독 경제가 흔들렸다. 위성국가를 돌보는 부담이 커진 ..

[차현진의 돈과 세상] [94] 말 한마디

[차현진의 돈과 세상] [94] 말 한마디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입력 2022.10.26 00:10 말 한마디가 세상을 뒤흔든다. 1997년 11월 외환 위기의 폭풍우가 몰려올 때 새로 임명된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시장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지금 IMF행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역효과를 일으켰다. 정부가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금융시장이 더 불안해졌다. 이틀 뒤인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장관이 시장을 안심시키기는커녕 겁을 주는 경우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1920년부터 일본의 반동 공황(反動恐慌)이 시작되었다. 1923년에는 관동 대지진까지 터져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수출 대기..

[차현진의 돈과 세상] [93] ‘여긴 어딘가’라는 질문

[차현진의 돈과 세상] [93] ‘여긴 어딘가’라는 질문 차현진 경제칼럼니스트 입력 2022.10.19 01:00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1990년대 인기 그룹 듀스가 부른 댄스 곡 가사다. “난 누군가?”는 철학적 담론이고, “여긴 어딘가?”는 과학적 담론이다. 콜럼버스를 포함한 모든 탐험가들이 “여긴 어딘가?”라는 질문과 싸웠다. 망망대해를 오래 떠다니다 보면, 자기 위치를 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릴레오나 뉴턴 같은 저명 과학자들까지 달라붙어 바다에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문제를 고민했다. 1568년 스페인의 멘다냐는 남태평양에서 섬들을 발견하고 거기가 보물섬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성경 속 풍요의 왕을 생각하며 ‘솔로몬 군도’라는 이름까지 붙였지만, 두 번 다시 찾아가지 못했다. 처음..

[차현진의 돈과 세상] [92] 언어와 국력

[차현진의 돈과 세상] [92] 언어와 국력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10.12 00:00 번역은 두 언어권을 연결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원문 뜻이 종종 왜곡되곤 한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는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는 성경 구절에서 낙타는 원래 밧줄이었다는 설이 있다. 중동의 언어인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옮길 때 예수 말씀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제2의 창조임이 틀림없다. 메이지 유신 시절 일본의 니시 아마네(西周)가 그랬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기간은 2년밖에 안 되지만, 엄청난 관찰과 고민을 통해서 서양 문명의 정수를 하나하나 신종 한자어로 옮겼다. 철학, 과학, 예..

[차현진의 돈과 세상] [91] 언어유희

[차현진의 돈과 세상] [91] 언어유희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10.05 00:00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은 말이 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이 그러하다. 이를 영어로 팰린드롬(palindrome)이라고 한다. 단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련하다, 사장집 아들 딸들아, 집장사 다하련가”처럼 문장으로도 가능하다. 웃긴다. 팰린드롬보다 조금 더 발전한 언어유희가 어크로스틱(acrostic)이다. 가로로 읽는 글의 각 행 첫머리를 세로로 읽으면 숨은 뜻이 드러나는 글이다. 우리나라의 삼행시가 그렇다.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아내에게 보낸 시의 각 행 첫 글자를 세로로 읽을 때 엘리자베스 즉, 아내 이름이 나온다. 그 암호가 풀리는 순간 웃게 된다..

[차현진의 돈과 세상] [90] 수에즈 운하

[차현진의 돈과 세상] [90] 수에즈 운하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입력 2022.09.28 00:00 제1차 세계대전의 주된 싸움터는 유럽이었다. 그나마 스페인은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고, 그리스와 미국은 마지막에 아주 살짝 발을 담갔다. 그러니까 ‘세계대전’이라는 표현은 지나치다. 처음에는 그냥 ‘대전(Great War)’이라 부르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별명은 “모든 전쟁을 끝낸 전쟁”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그 전쟁을 마무리하는 1919년 파리강화조약은 패전국 독일에서 극우파 나치가 부상하여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했다. 오늘날 중동 문제도 그때 싹텄다. 돈이 궁했던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태계 독립국가 설립을 지지한다”는 밀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