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3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3] SF라는 사고실험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3] SF라는 사고실험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9.20 03:00 과학에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은 실제 실험 대신에 상상 속에서 수행하는 가상 실험을 의미한다. 사고실험은 과학의 모델이 작동하는 방식과 새로운 과학적 이해가 얻어지는 과정을 교육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고실험이 가능하다. 해수면이 상승해도 우리는 지금처럼 살 수 있을 것인가? 의학이 계속 발달해서 사람의 수명이 연장된다면 노인들은 더 행복할 것인가? 지능을 가진 기계와 인간은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사고실험에 대해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해답은 미래 예측서가 아니라 ‘과학 소설’(science fiction, SF)에서 찾아..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2] 나비의 날갯짓으로 태풍 조절?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2] 나비의 날갯짓으로 태풍 조절?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9.06 03:00 1961년 어느 날, 미국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즈는 기상 모델을 이용해서 날씨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모델에 입력하는 변수의 초기 값으로 0.506127을 사용했는데, 두 번째 시도에서 실수로 0.506을 입력했다. 그런데 모델이 예측한 날씨는 첫 번째 것과 생판 달랐다. 미미한 차이였지만, 기후와 같은 복잡계에서는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이다. 로렌즈는 이 주제에 대해 논문을 쓰면서 끝에 “이 이론이 옳다면 갈매기가 날갯짓을 한 번 하는 게 날씨를 영원히 바꿀 수 있다”고 적었다. 1972년에는 “브라질의 나비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1] 2022 기초과학의 해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1] 2022 기초과학의 해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8.23 03:00 올해 2022년은 유엔이 지정한 기초과학의 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월 교육부가 ‘2022 유엔 세계기초과학의 해 한국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행사를 진행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4월에 기초과학진흥주간을 마련해서 과학 대중화 차원에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홍보했다. 기초과학의 해를 선포한 유엔이 7월에야 개막 기념식을 개최한 것에 비하면, 꽤 발 빠르게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레이저는 양자역학에서 예측되는 독특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고, 심장 혈관 질환의 치료도 콜레스테롤이 혈관에 쌓인다는 과학 연..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0] 달에서 본 ‘지구돋이’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10] 달에서 본 ‘지구돋이’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8.09 03:00 1961년 인공위성을 타고 처음으로 지구를 돈 구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멀리서 지구를 보니 지구는 싸우기에는 너무 작고 협력하기에는 충분히 크더라”는 소감을 전했다. 그가 지금까지 회자하는 멋진 얘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구를 먼 거리에서 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땅 위에 붙어서 태어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탐험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 땅에 붙어서 보면 지구가 탐험과 정복의 대상이지만, 멀리서 보니 지구는 싸우기에 너무 작은 행성이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한 해 전인 1968년, 달을 한 바퀴 돌고 지구로 귀환하는 임무를 띠고 아폴로..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9] ‘냉장고 엄마’ 이론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9] ‘냉장고 엄마’ 이론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7.26 03:00 1943년 미국 존스 홉킨스 의대에서 정신의학을 연구하던 리오 캐너(Leo Kanner)는 감정 교류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질환에 처음으로 ‘자폐증’(aut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자폐아를 만나고 치료하면서 이 병의 원인에 관심을 두었고, 자폐가 부모, 특히 엄마의 냉담한 태도에서 생긴다고 주장했다. 소아 정신 질환 전문가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도 자폐는 자식을 차갑게 대하는 냉장고 같은 엄마가 유발하는 병이라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자폐 아동의 엄마에게는 ‘냉장고 엄마’라는 호칭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냉장고 엄마’ 이론은 자폐 아동의 형제, 자매 ..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8] 제자를 알아본 스승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8] 제자를 알아본 스승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7.12 03:00 허준이 교수에게는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일본의 히로나카 헤이스케(廣中平祐) 교수와 만난 일이 결정적이었다. 학부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허준이는 서울대에서 초청한 히로나카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와 친해졌고, 대화와 토론을 진행하면서 수학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그의 조언을 따라 수학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그의 추천에 힘입어 미국 유학을 했다. 지금 최고 명문 대학교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필즈상을 받은 그가, 서울대 학부 성적이 나빠서, 지원했던 대학에서 대부분 떨어졌다. 우리는 창의성이 천재가 가진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허준이는 수학 천재의 능력을 갖..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7] 달까지 가자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7] 달까지 가자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6.28 03:00 지난 며칠 동안 직업, 성별, 나이,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원자력발전, 여성가족부 존폐, 정년 연장처럼 의견이 갈리는 논쟁적 주제가 나오면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때도, 이 얘기만 나오면 다시 분위기가 환해졌다. 마법 같은 이 주제는 바로 누리호의 성공이었다. 누리호 성공을 둘러싸고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갈등도, 성별 갈등도, 세대 갈등도, 떨어지는 주식에 대한 걱정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도 잠깐 잊어버린 것 같았다. 과학기술학(STS)에서는 ‘사회 기술적 상상(sociotechnical ..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6] 우주 주권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6] 우주 주권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6.14 03:00 우주가 다시 패권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9년에 우주 관련 군사 업무와 작전을 수행하는 ‘우주군’(Space Force)을 창설했고, 이를 바이든 행정부가 계승해 미항공우주국(NASA)의 70%에 상당하는 예산을 사용하는 거대 조직으로 우주군이 급성장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우주 굴기’ 사업을 통해 우주 패권에 도전해 왔고, 독자적으로 우주정거장(ISS)을 건설했다. 최근에 러시아는 미국과 협력해서 건설한 우주정거장에 대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제재에 대한 항의로 이 사업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대신 중국과 협력해 미국과 우주 패..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5] ‘역(逆·reverse) 과학적’ 방법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5] ‘역(逆·reverse) 과학적’ 방법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5.31 03:00 현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과학자는 데이터, 법칙과 이론, 모델, 시뮬레이션, 통계 등을 사용한다. 그런데 데이터는 불완전하고, 법칙과 이론은 근사치이다. 모델은 주관이 깊이 개입되며, 시뮬레이션과 통계는 항상 논쟁의 대상이다. 그래서 세상과 100% 딱 맞아떨어지는 과학은 없다. 자신의 이론이나 실험이 현실과 100% 일치한다고 한다면, 그는 고등학교용 교과서 과학을 하는 사람이거나 사기꾼일 것이다. 2001년 뉴욕에서 9·11 참사가 터졌을 때, 스티븐 존스 같은 물리학자는 건물의 잔해 속에서 화약에 사용되는 테르밋(thermite) 분말 가루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4] 피해자 중심의 과학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4] 피해자 중심의 과학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입력 2022.05.17 03:00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공식 사망자만 1742명으로 집계된 ‘단군 이래 최악의 참사’다. 그 외에 폐 질환으로 고생하는 환자, 암과 천식 환자. 알레르기나 피부병을 포함한 전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수천 명이다. 사망자 대부분을 낸 PHMG/PGH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한 회사 임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CMIT/MIT 살균제를 제조한 회사 임원들은 2021년 초에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은 기업은 벌을 다 받았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은 기업은 무죄라는 이유로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형사재판에서는 엄격한 인과관계를 밝히지 못하면 죄를 묻기 어렵다.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