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149) 추파(秋波)에 섰는 연꽃

(149) 추파(秋波)에 섰는 연꽃 중앙일보 입력 2022.11.10 00:09 업데이트 2022.11.10 01:27 업데이트 정보 더보기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추파(秋波)에 섰는 연꽃 안민영(1816∼1885) 추파에 섰는 연꽃 석양(夕陽)을 띄어 있어 미풍이 건듯하면 향기 놓는 너로구나 내 어찌 너를 보고야 아니 꺾고 어찌하리 -금옥총부(金玉叢部) 꽃과 풍류(風流) 석양, 잔잔하고 맑은 물결이 지는 가을 연못에 연꽃이 떠 있다. 바람이 선뜻 불면 물결이 지고, 연꽃의 향기가 주위에 번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너를 보고서야 꺾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안민영(安玟英)은 조선 후기의 가객이다. 1876년 스승인 운애(雲崖)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시가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여 시조문학을 ..

(148) 다시 가을에

(148) 다시 가을에 중앙일보 입력 2022.11.03 00:09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다시 가을에 이달균(1957∼) 또다시 늑대처럼 먼 길을 가야겠다 사람을 줄이고, 말수도 줄이고······ 이 가을 외로움이란 얼마나 큰 스승이냐 -한국현대시조대사전 말문을 잃는 가을 가을은 고독한 계절이다. 외로운 늑대처럼, 홀로 먼 길을 떠나는 계절이다. 그런 가을에는 만나는 사람도, 말수도 줄이게 마련이다. 그 외로움을 가르쳐주는 가을은 인생의 큰 스승이기도 하다. 이런 가을에, 수도 서울의 도심 이태원에서 들려오는 압사 참사의 비극은 말문을 잃게 한다. 지난 3년 코로나19에 갇혀 있다가 이제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이국적 문화로 자리 잡은 핼러윈을 즐기려던 젊은이들이 사람에 깔려 죽다니, 이 믿어지지 ..

(147) 설월(雪月)이 만창(滿窓)한데

(147) 설월(雪月)이 만창(滿窓)한데 중앙일보 입력 2022.10.27 00:35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설월(雪月)이 만창(滿窓)한데 무명씨 설월이 만창한데 바람아 부지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을 판연(判然)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적이면 행여 긘가 하노라 -병와가곡집 “비단 버선 신은 발이 밤새도록 시립니다”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조를 지은 가객(歌客)의 이름을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그의 신분은 기생이거나 중인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조에는 이렇게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도 작자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엄격한 신분제로, 작품집을 남긴 양반과 달리 평민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눈 쌓인 밤에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 가득히 비치고 있다. 바람..

(146) 두 소년

(146) 두 소년 중앙일보 입력 2022.10.20 00:21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두 소년 오동춘(1937∼) 얼음이불 깊은 속을 말없이 강이 흐른다 가슴에 할아버지 서로 잃은 두 소년 대화는 강이 아니다 벙어리로 굳는다 오고 갈 사랑다리 끊긴 세월 녹슬어 따로 살다 피는 흘러 두 소년이 만났어도 아, 말도 금이 갔던가! 사무치는 한 깊다 -현대문학(1979.4) 강한 무력(武力)이 전쟁을 막는다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의 계속되는 무력시위가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생각 한번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순식간에 닥칠 수도 있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평화를 염원하던 소망의 시간을 북은 핵 무력의 완성으로 답한 셈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이 전화에 휩싸여 있는 냉엄한 현실을..

(145) 추월(秋月)이 만정(滿庭)한데

(145) 추월(秋月)이 만정(滿庭)한데 중앙일보 입력 2022.10.13 00:23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추월(秋月)이 만정(滿庭)한데 김기성(생몰연대 미상) 추월이 만정한데 슬피 우는 저 기러기 상풍(霜風)이 일고(一高)하면 돌아가기 어려우리 밤중만 중천(中天)에 떠 있어 잠든 나를 깨우는가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가을은 명시(名詩)가 태어나는 계절 사계절 중에서도 가을 달빛은 유난히 맑고 밝다. 그 빛이 휘영청 뜰 안에 가득히 비치고 있는데, 높은 하늘에는 슬피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 소리가 더욱 처량하다. 겨울을 나려고 가을에 북쪽에서 날아오는 저 기러기. 차가운 서릿바람이 한 번 높이 일게 되면 되돌아가기도 어려울 터인데, 어떡하나? 한밤중에 하늘 높이 떠 있어 잠든 나를 깨우는구나. ..

(144) 볼트와 너트의 시(詩)

(144) 볼트와 너트의 시(詩) 중앙일보 입력 2022.10.06 00:31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볼트와 너트의 시(詩) 김복근(1950~) 무심코 돌려대는 볼트와 너트처럼 나는 조이고 있다 때로는 풀리고 있다 감출 수 없는 아픔에 벼랑을 딛고 섰다 -한국현대시조대사전 인생은 조이고 푸는 일 아니겠나? 둥근 막대의 바깥 둘레에 나선이 있는 나사를 수나사라 하고, 원통의 안쪽 둘레에 나선이 있는 나사를 암나사라 한다. 수나사를 볼트, 암나사를 너트라 하며, 볼트와 너트는 두 개 이상의 기계 부품을 조립할 때 사용한다. 이 시조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조이거나 푸는 볼트와 너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볼트와 너트로 짜여 있는가? 때로는 감출 수 없는 아픔에 벼랑을 딛고..

(143) 추강(秋江) 밝은 달에

(143) 추강(秋江) 밝은 달에 중앙일보 입력 2022.09.29 00:35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추강(秋江) 밝은 달에 김광욱(1579∼1656) 추강 밝은 달에 일엽주(一葉舟) 혼자 저어 낚대를 떨쳐드니 자는 백구(白鷗) 다 놀란다 어디서 일성어적(一聲漁笛)은 조차 흥(興)을 돕나니 -『청구영언』 진본(珍本) 운명을 좌우하는 인간 관계 가을의 정취가 함뿍 담겨 있는 시조다. 우조이수대엽(羽調二數大葉) 창(唱)으로도 즐겨 불렸다. 부귀공명을 모두 물리치고 강호에 묻혀 유유자적하던 산림학파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가을 강 밝은 달빛 아래 일엽편주를 혼자 저어나가, 낚싯대를 떨쳐 들어 올리니 잠들었던 갈매기가 모두 놀라 날아오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부의 한 줄기 피리소리가 더하여 흥을 돕는구..

(142) 마음의 일기(日記)

(142) 마음의 일기(日記) 중앙일보 입력 2022.09.22 00:26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마음의 일기(日記) 정지용(1902∼1950) 이즈음 이슬이란 아름다운 그 말을 글에도 써본 적이 없는가 하노니 가슴에 이슬이 이슬이 아니 나림이어라 -학조(學潮) 창간호(1925) 정지용의 시조 발견 한국시조시인협회의 기관지 ‘시조미학’ 2022년 가을호, 이정환 이사장의 권두언에 한기팔 시인이 찾아낸 정지용의 시조가 소개되었다. 그의 유명한 ‘카페 프란스’를 비롯해 동시를 발표할 때 함께 수록된 작품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은 아홉 수 한 편 연시조의 일곱 번째 수이다. 이 시조가 발표된 때는 1921년 육당 최남선이 ‘개벽’에 첫 시조 ‘기쁜 보람’을 발표한 4년 뒤이고, 최초의 개인 시조집 ..

울지마, 디미

Opinion :삶의 향기 울지마, 디미 중앙일보 입력 2022.10.04 00:44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디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지우즈킨 디미트로는 우크라이나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음악 명문가 출신인 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입니다. 그는 서울시립합창단 상임 단원을 지낸 김문수 메조소프라노와 인사동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한국에 들어와 국립오케스트라와 서울 팝스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던 디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조국이 전쟁 상태에 빠지자 졸지에 난민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황급히 우크라이나로 들어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스위스로 대피시키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서방 세계의 지원과 우크라이나의 반격으로 전황이 다소 호전되자 어머니는 수도 키이우로 귀환했다..

(141) 추산(秋山)이 석양을 띠고

Opinion :시조가 있는 아침 (141) 추산(秋山)이 석양을 띠고 중앙일보 입력 2022.09.15 00:39 지면보기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추산(秋山)이 석양을 띠고 유자신(1541∼1612) 추산이 석양을 띠고 강심(江心)에 잠겼는데 일간죽(一竿竹) 둘러메고 소정(小艇)에 앉았으니 천공(天公)이 한가히 여겨 달을 조차 보내도다 -악학습령(樂學拾零) 왕의 장인이 사는 법 대자연, 대우주처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태풍 지나간 가을의 석양이 눈부시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산이 저녁놀을 띠고 강물 깊이 잠겨 있다. 한 줄기 대나무 낚싯대를 둘러메고 작은 배에 앉아 있으니, 하늘의 제왕이 한가로이 여겨서 달까지 보내주는구나.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유자신(柳自新)의 본관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