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담백함(澹泊)

[가슴으로 읽는 한시] 담백함(澹泊)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담백함(澹泊) 澹泊貧家事 담박빈가사 無燈待月明 무등대월명 折花難割愛 절화난할애 芟草忍傷生 삼초인상생 白髮應吾有 백발응오유 靑山復孰爭 청산부숙쟁 狂歌當歲暮 광가당세모 秋氣劍崢嶸 추기검쟁영 담백함은 가난뱅이가 살아가는 등불 없어 달 뜨기만 기다린다 꽃을 꺾자니 사랑스러운 것을 어떻게 없애고 풀을 베자니 산 것을 차마 해치랴 백발은 당연히 내 차지고 청산은 어느 누가 욕심을 낼까 미친 노래 부르다가 한 해도 저무나니 가을의 기운 검처럼 서슬 퍼렇다 —허필(1709~1768) 한평생 곤궁하게 살다간 허필(許�B)이란 시인이자 화가가 있다. 어느 날 그가 당당하게 가난을 고백했다. 담백함이야말로 가난한 자가 가진 고귀한 재산이라는 것이다. 가난을 ..

[가슴으로 읽는 한시] 관악산 꽃 무더기 (冠峀花層·관수화층)

[가슴으로 읽는 한시] 관악산 꽃 무더기 (冠峀花層·관수화층)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관악산 꽃 무더기 (冠峀花層·관수화층) 躑躅花爭發 척촉화쟁발 朝曦又照之 조희우조지 滿山紅一色 만산홍일색 靑處也還奇 청처야환기 得意山花姸 득의산화연 簇簇繞峨嵯 족족요아차 莫愁春已暮 막수춘이모 霜葉紅更多 상엽홍갱다 앞다퉈 핀 철쭉꽃 위로 아침 햇살 내려 쪼인다 온 산 가득 붉은빛이라 파란 데가 외려 멋지다 제철 만난 산꽃은 어여쁘게 한 무더기 또 한 무더기 꼭대기까지 에둘렀다 봄이 저물까 걱정일랑 아예 말게나 단풍 들면 붉은 빛이 더 퍼질 테니 —신경준(1712~1781) 1760년 봄에 철쭉이 만발했다.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이 한강 북쪽에 위치한 첨학정(瞻鶴亭)에 앉아 관악산을 바라보니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온..

[가슴으로 읽는 한시] 호젓한 집(幽居·유거)

[가슴으로 읽는 한시] 호젓한 집(幽居·유거)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호젓한 집 (幽居·유거) 春草上巖扉 춘초상암비 幽居塵事稀 유거진사희 花低香襲枕 화저향습침 山近翠生衣 산근취생의 雨細池中見 우세지중견 風微柳上知 풍미유상지 天機無跡處 천기무적처 淡不與心違 담불여심위 봄풀이 사립문에 오른 곳 숨어 살아 세속의 일 드무네 꽃이 나직해 향기 베개에 스미고 산이 가까워 비췻빛 옷에 물드네 가는 빗방울 못물에서나 보이고 약한 바람 버들 끝에서나 알겠네 천기(天機)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곳 담담하여 마음과 어긋나지 않네 자연의 변화가 주는 멋은 번잡한 도회지보다는 호젓한 산속에 숨어 사는 이의 거처에서 더 잘 보인다. 고독과 고요함을 즐긴 유학자 송익필에게는 그 변화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베개에 스미는 향..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이 몸이 배가 되어

[가슴으로 읽는 한시] 이 몸이 배가 되어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이 몸이 배가 되어 나는 항상 소망하지 곡식 만 섬을 싣는 배가 되었으면, 배 안 넓은 곳에 다락을 세웠으면 하고 동으로 남으로 가는 나그네를 때가 되면 모두 건네주고 해 질 녘에는 무심히 두둥실 노닐었으면 하고. ―이항복(李恒福·1556~1618) 與守初(여수초) *호가 수초인 친구에게 준 시 常願身爲萬斛舟(상원신위만곡주) 中間寬處起柁樓(중간관처기타루) 時來濟盡東南客(시래제진동남객) 日暮無心穩泛遊(일모무심온범유) 백사(白沙) 이항복이 청년 시절에 지은 시다. 백사는 친구들과 강을 건너려고 배를 기다렸으나 며칠 동안이나 구할 수 없었다. 모두들 몹시 답답해하며 화를 낼 때 백사가 장난 삼아 이 시를 써서 그들을 달랬다. '나는 큰 배..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운자(韻字)를 부르기에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운자(韻字)를 부르기에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입력 2012.06.01 23:22 운자(韻字)를 부르기에* (呼韻·호운) 시장과 먼 곳에다 살 곳 정하고 약초 심고 이엉 엮어 집을 지었네 꽃 앞에는 술이 있어 함께 취하나 버들 아래 문 있어도 찾는 이 없네 방과 방엔 책과 그림 가득 채우고 부엌에는 생선과 나물 넉넉하여라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 있나니 속인들 조롱해도 괘념치 않네 卜居遠朝市(복거원조시) 種藥又誅茅(종약우주모) 酒有花前醉(주유화전취) 門無柳下敲(문무유하고) 圖書常滿室(도서상만실) 魚菜更餘庖(어채갱여포) 至樂元斯在(지락원사재) 不嫌俗子嘲(불혐속자조) ―서영수각(徐靈壽閣·1753~1823) 명문 사대부 집안의 부인이자 어머니인 서영수각의 시다. 귀부인이 마음속에 담고..

[가슴으로 읽는 한시] 빗속의 고래 싸움

[가슴으로 읽는 한시] 빗속의 고래 싸움 안대회·성균관대 교수· 한문학 고래가 비를 맞으며 바다에서 노는데 솟구친 이마와 코, 기세가 흉포하다 높은 파도 말아 올려 우주를 막아선 듯 외로운 섬 뒤흔들어 폭풍우가 싸우는 듯 대양의 남만(南蠻) 배는 뒤집힐까 걱정하고 바닷가 어촌에는 비린내가 뒤덮였다 회를 치면 배부르게 포식 한번 하겠구나 허리에 찬 청평검(靑萍劍)을 웃으며 바라본다 ―정홍명(鄭弘溟·1582~1650) 雨中觀鯨鬪(우중관경투) 鯨魚得雨戱滄溟(경어득우희창명) 額鼻軒空氣勢獰(액비헌공기세녕) 怒捲層濤妨宇宙(노권층도방우주) 聲掀孤嶼鬪風霆(성흔고서투풍정) 中洋蠻舶渾愁覆(중양만박혼수복) 傍岸漁村盡帶腥(방안어촌진대성) 斫膾可堪供一飽(작회가감공일포) 笑看腰下有靑萍(소간요하유청평)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호(..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우연히 읊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우연히 읊다 누군들 처음부터 선골(仙骨)이었나 나도 본래 번화한 삶 좋아했었지 몸이 병들자 마음 따라 고요해지고 길이 막히자 세상 절로 멀어지더군 구름과 산은 나를 끌어 부축해주고 호수랑 바다는 갈수록 어루만지네 선계(仙界)로 가는 열쇠를 부러워 말자 봉래산은 어김없이 갈 테니까 ―윤선도(尹善道·1587~1671) 偶吟(우음) 誰曾有仙骨(수증유선골) 吾亦愛紛華(오역애분화) 身病心仍靜(신병심잉정) 途窮世自遐(도궁세자하) 雲山相誘掖(운산상유액) 湖海與漸摩(호해여점마) 鐵鎖何須羨(철쇄하수선) 蓬萊路不差(봉래노불차) 시조시인으로 이름난 고산(孤山) 윤선도가 59세 때인 1645년에 지었다. 정계에서 물러나 전라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에서 지내는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별을 노래하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별을 노래하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별을 노래하다 밤 깊어 맑은 달 아래에서 뭇별이 한창 반짝거리네. 옅은 구름으로는 가리지 못하고 찬바람 불면 빛이 더 반짝이네. 진주알 삼만 섬이 파란 유리에서 반짝반짝! 허무에서 별빛이 무수히 일어나 우주의 원기를 북돋네. 부슬부슬 이슬꽃 내리고 동쪽에는 은하수 흐르는 소리. 누가 천체의 운행을 주관할까? 내 조물주에게 물어보리라. ―이좌훈(李佐薰·1753~1770) 衆星行(중성행) 夜深淸月底(야심청월저) 衆星方煌煌(중성방황황) 微雲掩不得(미운엄부득) 朔風就有光(삭풍취유광) 眞珠三萬斛(진주삼만곡) 磊落靑琉璃(뇌락청유리) 群芒起虛無(군망기허무) 元氣乃扶持(원기내부지) 霏霏露華滋(비비노화자) 明河聲在東(명하성재동) 天機孰主張(천기숙주장) 吾..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가한 내게 축하한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한가한 내게 축하한다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날마다 산을 보건마는 아무리 봐도 늘 부족하고 언제나 물소리를 듣건마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 자연으로 향하면 귀와 눈은 다 맑고도 상쾌해 그 소리와 그 빛 사이에서 평온한 마음 가꾸어야지. ―충지(沖止·1226~1292) 閑中自慶(한중자경) 日日看山看不足(일일간산간부족) 時時聽水聽無厭(시시청수청무염) 自然耳目皆淸快(자연이목개청쾌) 聲色中間好養恬(성색중간호양념) 충지는 고려 후기의 고승(高僧)으로 속명은 위원개(魏元凱)이다. 19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난 뒤 출가하였는데 시와 문장을 잘 지어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많은 작품이 실려 있다. 산에 사는 승려이니 눈에 보는 것이 산이고, 귀로 듣는 것이 물소..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감회가 있어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감회가 있어 안대회·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감회가 있어 농부의 별은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이고 안개 뚫고 서리 맞으며 동편 논으로 나간다. 시고 짠 세상맛은 긴 가난 탓에 실컷 맛보았고 냉대와 환대는 오랜 객지 생활에서 뼈저리게 겪었지 부모님 늙으셨으니 천한 일을 마다하랴 재주가 모자라니 육체노동하기 딱 어울린다. 경략(景略)*의 달변이 없으니 이(虱)를 문질러 잡으랴 온화한 낯빛으로 촌 노인네 마주해야지. ―이덕무(李德懋·1741~1793) 有感(유감) 農丈人星曉暎空(농장인성효영공) 烟霜衝冒稻陂東(연상충모도피동) 酸醎已熟長貧日(산함이숙장빈일) 冷暖偏經久旅中(냉난편경구려중) 親老那能辭鄙事(친로나능사비사) 才踈端合役微躬(재소단합역미궁) 談非景略何捫虱(담비경략하문슬) 姑把溫顔對社翁(고파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