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대변인 거친 말로 뭘 얻나
김원봉 복권이 그리 급한 일인가
역지사지는 곧 인류 최선의 진리
좌우 살펴야 도랑에 안 빠진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지난 번 이 자리에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 ‘사’를 버리고 한 가지 ‘사’만 취하라”고 썼었다. 버릴 사 셋은 진실이 아닌 걸 말하는 것(詐)과, 건전한 양식에서 벗어난 말을 하는 것(邪), 그리고 자기 걱정을 세상 걱정인 양 말하는 것(私)이었다. 취할 사 한 가지는 아무 때나 입을 열지 말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俟) 말해야 한다는 거였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캔터베리 대주교’로 꼽히는 윌리엄 템플(1881~1944)의 말을 내 나름대로 변용한 것이었다. 그는 좋은 말의 네 가지 조건으로 “진실이 담겨야 하고 양식을 갖춰야 하며 세상에 대한 걱정에서 나와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할 기회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 얘기가 더 중요하다. “말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 세 가지는 노력만 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
누구든 할 수 있는 거라 오히려 간과되기 쉬울 듯해 새삼 꺼낸 얘기였는데, 그게 쉽지 않았나 보다. 이후에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고 외려 악화되고만 있으니 말이다. 말이라기보다 욕에 가까운 언어들이 떼 지어 폭발하고, 그 위험 수위는 갈수록 올라가며 악취도 더욱 고약해졌다. 말이 거의 전부인 정치권과 그들을 첨병으로 내세운 좌우 양쪽 진영에서 말 아닌 말로 서로 물고 뜯는다.
제1야당 대변인의 입은 한마디로 지나치다. 대변인으로서 자격이 있는가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그의 말들은 재삼 인용할 가치도 없는데, 궁금한 것은 과연 그가 그런 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언가 하는 점이다. 당 대변인이란 당 대표나 당론을 충실히 공표하고 옹호함으로써 당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최대화하고 부정적 반응을 최소화하는 역할 아니었던가. 그러기 위해서 상대 당에 대한 논평을 할 때도 지극히 절제되고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 아니었던가. 자당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 당과의 대화와 합의라는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선데이 칼럼 6/15
야당 대변인을 비난하고 있는 정부·여당 역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야당의 막말을 비난하고 있지만, 스스로 막말을 유발하는 측면이 없잖은 까닭이다. 대통령의 말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고 백 번 훈장을 줘도 잘못될 게 없을 터다. 하지만 그게 다른 일 다 제쳐두고 해야 할, 그토록 급한 일인가. 그게 현충일 추념사에서 꺼냈어야 할 만큼 위중한 일인가.
앞의 사 세 가지는 없다 쳐도 마지막 하나를 취한 게 잘못된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걸 했기 때문에 더 나쁜 거다. 야당 대변인의 말처럼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숙고한 끝에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문장이어서 다른 의도를 의심받는 것이다. 야당 대변인이 막말로 까부르지 않고, 점잖게 조목조목 짚었더라면 청와대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버릴 사 셋 취할 사 하나’가 어렵다면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알다시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거다. 성경에도 나오고, 주역에도 나오는 인류 최고, 최선의 진리가 바로 역지사지다. 칸트의 ‘정언 명령’과 홉스의 ‘제2 자연법’ 역시 다른 게 아니다.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이 시기에 특히 필요한 말이 아닌가 싶다.
길의 양 옆은 도랑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급하게 달리면 도랑에 빠질 뿐이다. 왼쪽 도랑이건 오른쪽 도랑이건 다치는 건 마찬가지다. 양 옆을 다 살피면 치우치지 않는다. 도랑에 빠질 일도 없다. 좀 더디 가더라도 길 가운데로 안전하게 가는 게 낫다. 방법은 단 하나 역지사지다. 보수건 진보건 다 나라 잘되고 백성들 잘살게 하자는 건데 역지사지 못 할 게 뭐 있겠나 말이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