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김광일의 입] ‘남·북·미 역사적 만남’이라는 마취주사

bindol 2019. 7. 2. 05:32


문점에서 트럼프·김정은·문재인, 세 사람의 짧은 만남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북 정상회담이 53분간 별도로 있었고, 다른 방에 있었던 문 대통령은 일종의 ‘옵서버’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도 ‘역사적 순간’이라는 말을 썼고, 문 대통령은 아예 ‘역사적’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응원 목소리라도 내듯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실상(de facto) 종전선언을 천명한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고, 노영민 비서실장도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KBS 실황중계는 ‘역사적’이란 말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오늘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보도 전문을 보면 ‘력사적 상봉’, ‘력사적 순간’, ‘력사적인 장면’, ‘새로운 역사’, ‘역사를 뛰어넘을 세기적인 만남’ 같이 무려 7차례나 역사를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진짜 역사를 되돌아보자. 지금부터 정확하게 19년 전인 2000년 6월 평양에서 김대중·김정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그때도 당국자들과 언론들은 모두 ‘역사적인 만남’이라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한국 정부는 ‘퍼주기’ 경제 지원에 나섰다. 북한은 여섯 차례 핵실험 끝에 50기 안팎의 핵탄두와 수백 기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사실상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말 진짜 역사는 어떻게 흐르는지 사례를 하나 더 보자. 바로 1978년에 있었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피로 얼룩진 중동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별장인 워싱턴 근교 캠프 데이비드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불렀다. 온 세계가 ‘역사적 협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대중 대통령처럼 이 사람들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뒤로 아랍권 전체가 강력히 반발하고 중동 분쟁이 끊이지 않으면서 이 협정의 의미도 퇴색하고 말았다.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결국 평화가 깨지고 만다는 ‘노벨평화상의 저주’가 오히려 진짜 역사에 가깝다.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말은 당사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역사적’이라는 말은 당대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사건을 뒤돌아보며 내리는 객관적 평가여야 한다. 이번 판문점 3자 회동은 역시 엄밀한 뜻에서 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의 입으로 역사적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는 이미 2년이나 남은 다음 대선 도전을 선언했다. 그는 일본 오사카와 판문점에 오기 불과 열흘 전인 6월18일 플로리다에서 재선 출정식을 가졌다. 그래서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의 판문점 방문과 남·북·미 3자 회동을 마치 트럼프의 대선 유세장 바라보듯 보도하고 있다. CNN은 "트럼프의 쇼맨 본능", AP통신은 "김정은에게 프로파간다 승리를 안겨줄 것",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도박을 감행했다"고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중 가장 차분하고 객관적인 진단을 내렸다. "양측은 북한이 핵무기를 어떻게, 언제 포기할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깊은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 이번 만남이 ‘상징성’을 넘어설지는 불확실하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흥분 상태를 깨어나게 해주는 현실적 상황 판단이다.

저들이 말하는 ‘역사적 만남’이 백 번 이뤄져도 변함없는 첫 번째 현실 쟁점은 ‘북한 핵무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북한은 핵실험과 핵무장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미리 통보하거나 상의한 적이 없다. 그런데 겨우 ‘입구’에서 서성이는 핵 폐기 협상을 시작하자면서 돈 내놔라, 쌀 내놔라, 체제 보장해라, 제재 풀어라, 한반도 작전 권역의 미국 전략자산 없애라, 온갖 요구 조건을 내걸고 있다. 그게 바로 핵무기가 갖는 본질이다. 이 본질을 잊으면 안 된다. 문재인 정권은 ‘역사적 만남’이라는 말로 국민들에게 마취 주사를 놓으면 안 된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유튜브 ‘김광일의 입’, 상단 화면을 눌러 감상하십시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01/20190701028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