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특징적인 풍경은 툭 트인 넓은 들판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에서 기껏해야 열댓 마지기의 전답만 보고 자란 사람들은 전라도의 들판을 마주하면 독특한 느낌을 갖는다. 이 들판에서 인물도 나오고 사상도 나오고 혁명도 나오고 계급투쟁도 나왔다. 김제시 성덕면의 호남평야 들판 한가운데 약간 솟아 있는 구릉지대에 자리 잡은 학성강당(學聖講堂) 터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명당'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8세기의 미륵 신앙 주창자인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생가 터인 대석정(大石井)도 바로 이 지점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유학의 맥이 사라진 호남에서 마지막까지 사서삼경을 강학하던 서당이 바로 이 '학성강당'이다. 엊그제 작고한 화석(和石) 김수연(金洙連·1926~2019) 선생이 여기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마지막 호남 유학자였다. 평생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다녔으며, 흰색의 한복을 죽을 때까지 입고 다니면서 유학자로서의 체통과 풍모를 유지했던 인물이다. 10여년 전쯤 필자가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왜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안 받습니까?"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받으면 훈장이 되고, 수업료를 안 받으면 선생이 되지." 그의 학문적 연원은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였다. 구한말과 왜정 시대에 유학자로서 영남의 면우 곽종석과 호남의 간재 전우는 쌍벽을 이루었다. 간재가 파리장서(巴里長書·1919)에 서명 안 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미 동학혁명 때 약 20만명의 호남 사람들이 일본군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살육을 당하는 처절한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였기 때문에 쉽게 서명할 수 없었다고 보인다. 동학 때 전국적으로 약 30만명이 죽었다고 추산하는데, 그 가운데 20만명은 전라도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전봉준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의 경우에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70여 집안 가운데 동학혁명 후에는 62개 집안의 문중이 해체되는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인명 피해가 적었던 지역에서는 강공 드라이브를 걸 수도 있지만, 20만명의 대량 학살이 있었던 동네에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 서명 행위 가지고 일본군의 기관총을 상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간재는 서해안의 섬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간재로부터 양재 권순명, 서암 김희진으로 이어지는 기호 학맥을 화석이 전수받았다. 20대 시절에 전국을 걸어 다니는 여행을 하면서 사서삼경을 외웠고, 한학자로 살다가 갑자기(?) 국회의원이 된 청곡 김종회(55)가 화석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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