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중국 “왜 죽지 않고 살아서 왔나” 귀환 포로들 혹독한 심문

bindol 2019. 12. 28. 07:17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7〉

지룽항에서 반공의사를 맞이하는 대만 주재 미군사령관. 왼쪽 첫째는 국방부 정치부 주임 장징궈. [사진 김명호]

지룽항에서 반공의사를 맞이하는 대만 주재 미군사령관. 왼쪽 첫째는 국방부 정치부 주임 장징궈. [사진 김명호]


1954년 1월 3일 새벽 평양역, 지원군 포로를 태운 열차가 기적을 울렸다. 신의주와 압록강 철교, 단둥(丹東)을 거쳐 선양(瀋陽)까지 내달렸다. 선양의 동북군구(東北軍區)는 귀환포로를 귀래자(歸來者), ‘돌아온 사람’이라 불렀다. 교육을 위해 창투(昌圖)에 귀관처(歸管處)를 신설했다. 귀래자들은 한동안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창투 명물인 돼지고기와 술도 실컷 먹고 마셨다. 몸과 마음이 느슨해질 무렵, 귀관처 주임이 귀래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선언했다. “정치심사와 기절(氣節)교육을 한다.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적어 제출해라. 잘한 일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 없다. 착오가 있었던 부분을 자세히 적어라. 공은 공이고 허물은 허물이다. 공이 허물을 덮을 수 있는지는 조직이 판단한다. 엄격한 심사와 신중한 처리를 마친 후 새로운 일자리를 안배하겠다.”
  

변절자 낙인 찍어 군·당·단서 퇴출
고향에선 ‘특수 혐의자’ 취급
파혼당하고 가족·친척들도 냉대

대만 간 포로들은 ‘중공 간첩’ 고초
퇴역 후 자리 못 잡고 부랑인 생활

여성 혁명가 영화 보여주고 “너희는 죄인”
 

대만에서 가족과 재회한, 사연 많은 반공의사도 있었다(사진 왼쪽), 1982년 1월 명예를 회복, 영웅으로 부활한 우청더(오른쪽). [사진 김명호]

대만에서 가족과 재회한, 사연 많은 반공의사도 있었다(사진 왼쪽), 1982년 1월 명예를 회복, 영웅으로 부활한 우청더(오른쪽). [사진 김명호]


기절교육은 영화감상으로 시작했다. 귀래자들에게 자오이만(趙一曼·조일만), 낭아산5장사(狼牙山五壯士), 8녀투강(八女投江) 같은 영화를 계속 보여줬다. 자오이만은 황푸군관학교와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을 마친, 중공이 자랑하는 미모의 여성 혁명가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동북(만주)을 점령하자 자오이만을 동북에 파견했다. 자오이만은 만주총공회 비서를 역임하며 조직을 키웠다. 1935년 겨울,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하얼빈 헌병대에서 8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형장에 끌려가는 차 안에서 딸에게 비장한 유서를 남겼다. “나는 네게 교육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항일투쟁에 온몸을 던졌다. 모친으로서 유감이다. 이제 나는 생전에 영원히 너를 만날 기회가 없다. 부디 잘 자라서 지하에 있는 나를 위로해라. 나는 천 마디 만 마디 말 대신 행동으로 너를 교육했다. 성인이 된 후에 모친이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1936년 8월 2일, 자오이만.” 낭아산5장사나 8녀투강도 적의 포로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 용사들이 절벽과 강 언덕에서 몸을 던진 내용이었다. 귀래자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 같았다.
 
귀래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비슷한 내용을 기술했다. “삶을 탐하고 죽음이 두려웠다. 포로가 되기 위해 내 발로 투항했다.” 귀관처의 심문이 심할수록 답변도 조리가 있었다. 미군이나 국군이 다 아는 부대번호 실토도 군사기밀을 폭로했다고 자인했다. 양식과 실탄이 떨어져 저항능력 상실로 포로가 됐던 귀래자들은 굴복 혹은 의기를 상실했다고 가슴을 쳤다. “낭아산5장사와 강에 투신한 8명의 여전사에 비하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다.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 귀래자 중에는 쓰촨(四川)성 출신이 제일 많았다. 7000여 명 중 2000명을 약간 웃돌았다. 자오이만도 본적이 쓰촨이었다. 쓰촨 출신 귀래자들은 고향에 돌아갈 엄두를 못 냈다.
 

지룽항에 도착한 반공의사와 환영객. [사진 김명호]

지룽항에 도착한 반공의사와 환영객. [사진 김명호]


6월이 되자 방침이 정해졌다. “포로시절 잠시 우경화됐지만 즉시 반성하고 수용소에서 적과의 투쟁에 돌출한 행동을 취했던 귀래자는 군에 복귀시킨다. 단, 당적(黨籍)과 단(공산주의청년단)적은 보류한다. 포로가 된 후 엄중한 실책을 범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적과의 투쟁을 인정받은 사람은 포로가 되기 전 부대에 복귀시키지만, 당과 단에서는 퇴출한다. 포로가 된 후 투쟁에 참여했다가 변절한 경우는 군, 당, 단에서 모두 퇴출한다.” 귀래자 6000여 명 중, 중공 당원은 2900명 정도였다. 그중 91.8%가 당에서 제명당했다.
 
귀래자들은 수긍하지 않았다. 귀관처 측은 단호했다. “조선은 사방에 산이 널려있다. 탄약과 양식이 떨어지면 산속에서 유격전 펴다가 낭아산 장사들처럼 자진(自盡)해야 한다. 살아서 돌아온 너희들은 인민의 죄인이다. 많은 동지가 희생됐다. 무슨 재주를 부렸기에 살아서 돌아왔는지 궁금하다.”
 
귀래자들은 ‘특수 혐의자’나 ‘특수당원’ 모자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하들과 계곡에서 유격전 벌리다 포로가 된 우청더(吳成德·오성덕)는 귀래자 중 직급이 제일 높았다. 부하들과 헤어지며 오열했다. “항미원조에 나섰다가 이런 꼴로 고향에 돌아가게 만든 내가 진짜 죄인이다. 동지들에게 죽을죄를 졌다.”
  
70세 넘어 명예 회복되자 대성통곡
 

동북에 잠입하기 직전 딸과 함께 찍은 자오이만의 유일한 사진. [사진 김명호]

동북에 잠입하기 직전 딸과 함께 찍은 자오이만의 유일한 사진. [사진 김명호]


귀래자들은 집안에서 냉대를 받았다. 친척도 등을 돌렸다. 약혼자도 열에 아홉은 파혼을 요구했다. 어쩌다 얻어걸린 직장은 더 심했다. 툭 하면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문혁 때 겪은 고초는 포로시절이 그리울 정도였다. 1982년, 당 중앙이 변덕을 부릴 때까지 편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70이 넘어서 명예가 회복되고, 인민의 영웅이 된 우청더는 실성한 사람 같았다. 며칠간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대만을 선택한 지원군 포로들은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을 출발했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지원군 포로들을 반공의사(反共義士)로 변신시켰다. 대만에 도착하는 1월 23일을 ‘자유의 날(自由日)’로 선포했다. 새벽 3시 반공의사 1만4000명을 태운 미군 수송선 16척이 지룽(基隆)항에 도착했다.  
 


반공의사의 귀국과 영접을 책임졌던 국방부 제2청 청장 라이밍탕(賴名湯·뢰명탕)이 구술을 남겼다. “지룽항은 인산인해였다. 각계 대표와 모든 단체의 대표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두 양측에 시민과 학생들이 가득했다. 폭죽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항일전쟁에 승리한 날보다 더했다.”
 
환영은 잠시였다. 국민당 정부는 반공의사를 군에 편입시켰다. 반공의사 중에 중공이 침투시킨 간첩을 색출하기 위해 자수 기간을 설정했다. 1217명이 제 발로 자수했다. 반공의사들은 몸에 세긴 문신이 문제였다. 어딜 가도 티가 났다. 워낙 저학력이다 보니 퇴역 후에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다. 결혼은 꿈도 못 꿨다. 노동판에서 번 푼돈 들고 사창가 기웃거리며 늙어갔다. 포주들에게 얻어맞는 일도 다반사였다. 인간이 연출하는 유희 중, 가장 고약하고 생사람 잡기 쉬운 것이 전쟁과 어설픈 심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