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7〉 1954년 1월 3일 새벽 평양역, 지원군 포로를 태운 열차가 기적을 울렸다. 신의주와 압록강 철교, 단둥(丹東)을 거쳐 선양(瀋陽)까지 내달렸다. 선양의 동북군구(東北軍區)는 귀환포로를 귀래자(歸來者), ‘돌아온 사람’이라 불렀다. 교육을 위해 창투(昌圖)에 귀관처(歸管處)를 신설했다. 귀래자들은 한동안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창투 명물인 돼지고기와 술도 실컷 먹고 마셨다. 몸과 마음이 느슨해질 무렵, 귀관처 주임이 귀래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선언했다. “정치심사와 기절(氣節)교육을 한다.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적어 제출해라. 잘한 일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 없다. 착오가 있었던 부분을 자세히 적어라. 공은 공이고 허물은 허물이다. 공이 허물을 덮을 수 있는지는 조직이 판단한다. 엄격한 심사와 신중한 처리를 마친 후 새로운 일자리를 안배하겠다.” 변절자 낙인 찍어 군·당·단서 퇴출 여성 혁명가 영화 보여주고 “너희는 죄인” 기절교육은 영화감상으로 시작했다. 귀래자들에게 자오이만(趙一曼·조일만), 낭아산5장사(狼牙山五壯士), 8녀투강(八女投江) 같은 영화를 계속 보여줬다. 자오이만은 황푸군관학교와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을 마친, 중공이 자랑하는 미모의 여성 혁명가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동북(만주)을 점령하자 자오이만을 동북에 파견했다. 자오이만은 만주총공회 비서를 역임하며 조직을 키웠다. 1935년 겨울,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하얼빈 헌병대에서 8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형장에 끌려가는 차 안에서 딸에게 비장한 유서를 남겼다. “나는 네게 교육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항일투쟁에 온몸을 던졌다. 모친으로서 유감이다. 이제 나는 생전에 영원히 너를 만날 기회가 없다. 부디 잘 자라서 지하에 있는 나를 위로해라. 나는 천 마디 만 마디 말 대신 행동으로 너를 교육했다. 성인이 된 후에 모친이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1936년 8월 2일, 자오이만.” 낭아산5장사나 8녀투강도 적의 포로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 용사들이 절벽과 강 언덕에서 몸을 던진 내용이었다. 귀래자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 같았다. 6월이 되자 방침이 정해졌다. “포로시절 잠시 우경화됐지만 즉시 반성하고 수용소에서 적과의 투쟁에 돌출한 행동을 취했던 귀래자는 군에 복귀시킨다. 단, 당적(黨籍)과 단(공산주의청년단)적은 보류한다. 포로가 된 후 엄중한 실책을 범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적과의 투쟁을 인정받은 사람은 포로가 되기 전 부대에 복귀시키지만, 당과 단에서는 퇴출한다. 포로가 된 후 투쟁에 참여했다가 변절한 경우는 군, 당, 단에서 모두 퇴출한다.” 귀래자 6000여 명 중, 중공 당원은 2900명 정도였다. 그중 91.8%가 당에서 제명당했다. 귀래자들은 집안에서 냉대를 받았다. 친척도 등을 돌렸다. 약혼자도 열에 아홉은 파혼을 요구했다. 어쩌다 얻어걸린 직장은 더 심했다. 툭 하면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문혁 때 겪은 고초는 포로시절이 그리울 정도였다. 1982년, 당 중앙이 변덕을 부릴 때까지 편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70이 넘어서 명예가 회복되고, 인민의 영웅이 된 우청더는 실성한 사람 같았다. 며칠간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일성, 친중파 대거 숙청…마오는 묵인하고 우호 손길 (0) | 2019.12.28 |
---|---|
마오 “김일성, 티토의 길 걸을 가능성 있다” 독자 노선 우려 (0) | 2019.12.28 |
1953년 3월 스탈린 사후 소련, 중·북에 “조선전쟁 빨리 끝내라” (0) | 2019.12.28 |
김일성 만난 마오쩌둥 “지금은 동풍이 서풍을 압도할 적기” (0) | 2019.12.28 |
미군 ‘이부제부’ 전략…중국군 포로 1만4000명 대륙행 거부 (0) | 2019.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