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2> 10여년 전만 해도, 휴전선 인근 마을에 가면 이런 말 하는 촌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쟁 때 중공군들이 제일 친절했다. 민심 얻는 법을 잘 아는 군대였다. 중공 오랑캐가 어쩌고저쩌고 폄하하는 노래가 한동안 유행했다. 전쟁 시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차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양민과 부녀자들에게 정말 못되게 군 놈들은 따로 있었다.” 정전 때 북에 중국 지원군 120만명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상의 막이 내렸다. 2년 전 7월 10일 피아가 마주한 지 748일 만이었다. 총성이 그쳐도 중국지원군은 북한을 떠나지 않았다. 완전히 철수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정전 당시 북한에는 지원군 120만명이 있었다. 지원군총사령부(총부)가 전후 군대의 임무를 전 군에 지시했다. “계속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강한 훈련으로 전력을 강화해라. 조선 인민과의 단결을 증진시켜라. 경제 협력과 건설에 협조해라. 조국 건설의 열정을 조선 건설에 보태라.” 총부 정치위원 왕핑(王平·왕평)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지원군은 전후 5년간 조선 건설에 힘을 보탰다. 881개의 공공시설과 주택 4만5천 가구, 교량 4260개, 저수지 2295개를 건설하고 나무 3600만 그루를 심었다. 물자 운송과 북한 주민 치료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각종 물자 6만3000여톤을 실어 나르고 188만여명을 치료했다. 조선의 재건사업에 피와 땀을 흘렸다. 지원군은 거의가 농민 출신이었다. 농활(農活)이 낯설지 않았다. 주둔지에 한 치의 황무지도 허락할 수 없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와 김일성은 충돌이 잦았지만, 주먹질까지는 가지 않았다. 1951년 10월 23일, 지원군 참전 1주년을 앞두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이사회가 열렸다. 펑더화이에게 1급 국기훈장을 수여하기로 의결했다. 펑더화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훈장 받을만한 공을 세우지 않았다. 후방에서 잔소리나 했을 뿐이다. 훈장은 나보다 공이 많은 전쟁영웅들에게 줘라.” 중공 중앙군사위원회의 전령을 받고 나서야 수락했다. 그래도 뭔가 찜찜했던지 김일성에게 한마디 했다. “영광이지만 불안하다. 내겐 적합하지 않은 훈장이다. 가오강(高崗·고강)과 훙쉐즈(洪學智·홍학지)가 받아야 한다. 두 사람이 불철주야, 탄약과 양식을 공급하지 않았다면 모든 작전이 불가능했다.” 덤으로 농담도 잊지 않았다. “초기에 미군과 연합군 덕도 봤다. 그 사람들 남한과 북한도 구별 못 하는 것 같았다.” 지원군이 주둔하는 동안, 중국은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1956년 8월, 이른 봄부터 꿈틀거리던 김일성 격하 운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친중파(연안파) 일부가 김일성을 비판했다. 김일성은 중국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연안파를 쓸어버리고 소련에 기댔다. 헝가리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련이 출병하자 외무상 남일이 평양 주재 소련대사에게 공언했다. “금후 조선은 소련과의 우호를 공고히 할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 빈말이 아니었다. 외무성은 소련이 알면 낯 찡그릴 중국 관련 소식과 자료를 계속 소련 대사관에 보냈다. 중국은 알고도 모른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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