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7〉 흔히들 선쥔산(沈君山·심군산)과 롄잔(連戰·연전), 천리안(陳履安·진리안), 첸푸(錢復·전복)를 “대만 4공자(四公子)”라 불렀다. 대만은 물론이고 대륙에서도 그랬다. 4공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1930년대에 태어났다. 공자 소리 들으려면 가계가 중요하다. 전 국민당 주석 롄잔의 조부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만의 애국시인이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전염병처럼 창궐하자 대만통사(臺灣通史)를 저술한 문단과 학계, 언론계의 대부였다. 정치가였던 부친도 재직 중 칭송을 받았다. 총통부 건너편 2·28 기념공원(원래는 청년공원)에 흉상을 세울 정도로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대만 4공자의 1인 물리학자 선쥔산 천리안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직계 천청(陳誠·진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대 대만은 출국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공무 출장 아니면 엄두도 못 냈다. 유학도 예외가 없었다. 천리안이 대학 1학년 때 MIT에서 전액 장학금 증서를 받는 바람에 규정이 바뀌었다. 화교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미래의 총통감 소리가 나돌았다. 1980년대 초, 홍콩의 유명 잡지에서 본 내용이 새롭다. 기억을 더듬어 소개한다. “마오쩌둥과 장제스 모두 세상을 떠났다.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앞으로 장씨가 통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장징궈는 건강에 문제가 많다. 덩샤오핑과 장징궈 이후 양안의 집권자를 현재는 예측하기 힘들다.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은 혁명정당이다. 혈통이 중요하다. 중공은 현 부총리 리펑(李鵬·이붕)이 가장 유력하다. 리펑은 1세대 혁명가 리스쉰(李碩勛·이석훈)과 자오쥔타오(趙君陶·조군도)의 외아들이다. 국민당은 세 살배기 리펑이 보는 앞에서 리스쉰을 참수했다.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鏞·김용)과의 인연도 시작은 소설이었지만, 결국은 바둑이었다. 선쥔산은 미국유학 시절 진융의 애독자였다. “1960년대 초 진융은 자신이 발행하던 명보월간(明報月刊)에 무협소설을 연재했다. 연재를 마치기가 무섭게 유학생 사회에 해적판이 나돌았다. 프린스턴대학에 재학 중이던 나는 주말마다 뉴욕에 갔다. 데이트하고 중국 음식 먹은 후에 진융 소설을 사러 책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소설을 보면서 작가가 바둑에 심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만나고 싶었다.” 선쥔산은 바둑만이 아니었다. 체스 실력도 발군이었다. 졸업 후 전 미국 체스대회에 출전, 우승했다. 대만에 돌아온 선쥔산은 칭화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행정원 정무위원으로 입각한 것 외에는 대학을 떠나지 않았다. 국사(國事)에도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민주화와 양안 관계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1980년대, 대만은 계엄상태였다. 정부와 재야의 소통에 발 벗고 나섰다.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보석을 끈질기게 청원했다. “국민당은 혁명정당이다. 지금은 민주인사들을 석방하고 다당제를 수용하는 것이 혁명이다.” 총통 장징궈는 한 술 더 떴다. 결자해지, 민주인사들을 풀어주고 야당 창당도 하건 말건 내버려 뒀다. 38년간 지속된 계엄령도 해제했다. 덩샤오핑이 일국양제를 제창하고 손을 내밀어도 모른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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