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속에 주막집들이 있었다. '아니! 이 산속에 웬 주막이.' 조선시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리산을 유람했던 유산로(遊山路)를 추적하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옛날의 주막집 터가 발견된다. 과거에 지리산은 인적이 드문 심산유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리산을 둘러싼 500리 길.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의 민초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종으로 횡으로 고갯길과 봉우리들을 넘어 다녀야만 하였다. 봇짐 장사도 산길을 넘어 다녔을 것이고, 약초를 캐던 심마니들도 다녔다. 양반 유생들은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 산을 올랐고, 조선 체제에 반항했던 당취(黨聚)들과 산공부(기도를 하거나 호흡 수련을 가리킴)를 하던 방외지사(方外之士)들도 거미줄 같던 지리산 길을 꿰고 있었다. 이들을 위해서 깊은 산속에 주막집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메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막걸리나 동동주. 파전, 보리밥 한 덩이를 넣은 국밥, 그리고 헛간방 정도가 아니었을까. 가파른 고갯길을 등짐을 지고 서너 시간 올라오면 얼마나 허기가 졌을까.
지리산 동북부의 산청군 유명리 새재마을. 여기도 해발 700~800m는 된다. 새재에서 출발하여 함양군 마천 추성리로 넘어가는 산길도 대략 40리가 넘는다. 1000m가 넘는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중간에 옛날 주막집 터가 하나 있었다. '아홉모랭이 사거리 주막터'이다. 해발 1100m 높이. 옛날에는 이 지점이 사거리로 불렸다니 흥미롭기만 하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왜정 때까지 주막집이 유지되다가 6·25를 전후하여 철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빈터의 녹색 신록 속에서 온통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만 들린다. 주막집이 아니라 신선이 거처했던 곳 같은 정취이다. 여기에서 1시간 정도 숲길을 더 걸어가니 청이당 터가 나온다. 여기는 물이 많아서 주막에서 샤워를 하고 탁족을 하기가 좋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고 계곡 물소리만 들린다.
심산주막(深山酒幕)이 다 없어졌지만 근래에 하나 자생적으로 복원된 주막이 형제봉 주막이다. 하동군 악양면, 지리산의 형제봉 밑에 있다. 배산임수의 전형인 악양(岳陽)은 도시 사람들의 귀촌 1번지이다.
주막 주인인 송영복(63)씨는 IMF 때 빈털터리가 되어서 고향인 하동으로 귀촌했다. 비어 있던 시골 구판장 건물을 개조한 10평 공간의 주막이다. 인생 체취가 배어 있는 주막 주인의 기타 노래가 산중의 풍류를 느끼게 한다. 지리산의 유구한 주막집 전통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