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일본과 수교한 영국은 도쿠가와 막부에 일본 연해 측량 허가를 요청한다. 항행 안전을 위한 근대 해도(海圖·nautical chart)를 구비하지 못한 막부는 고심 끝에 막부 관리의 동승을 조건으로 측량을 허가한다. 조수 간만, 수심 등을 측정해야 하는 해도 제작은 고도의 측량 기술을 요한다. 1861년 영국의 측량에 입회한 막부의 관리들은 해양 시대를 맞아 해도 제작 능력 확보가 국가적 과제임을 깨닫는다. 막부에 이은 메이지 신정부는 해도 제작에 더욱 의욕적이었다.
정책 결정자의 정확한 현실 인식, 우수한 인재의 적재적소 기용, 선진 외부 파트너 확보란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것이 해도 제작 능력을 일본이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패스트 팔로어(fast-follower) 전략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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