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256] 용지허실 (用之虛實)

bindol 2020. 8. 2. 06:06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고재식 선생의 도움으로 다산이 제자 황상(黃裳)에게 준 증언첩(贈言帖)을 처음 보았다. 다산이 1815년 5월에 황상을 위해 써준 11조목의 친필이다. 내용이 다 아름다운데 그중 다음 한 단락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연꽃을 심는 것은 빌려 감상하는 데 지나지 않으나, 벼를 심는 것은 먹을거리를 제공해 줄 수가 있다. 그 쓰임새의 허실[用之虛實]이 서로 현격하다. 하지만 논을 넓혀 연을 심는 못을 만드는 사람은 그 집안이 반드시 번창하고, 연 심은 못을 돋워 논으로 만드는 사람은 그 집안이 반드시 쇠미해진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는 큰 형세가 쇠하고 일어나는 것이 인품의 빼어나고 잔약함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송곳이나 칼끝 같은 소소한 이해쯤은 깊이 따질 것이 못된다"(種蓮不過借玩賞, 種稻可以給餽餉. 其用之虛實相懸也. 然廓稻田以爲蓮沼者, 其家必昌, 夷蓮沼以爲稻田者, 其家必衰. 斯何故也. 是知大勢衰旺, 繫乎人品之俊孱, 小小錐刀之利害, 未足深爭也).

연을 심는 것은 감상을 위해서요, 벼를 심음은 먹을거리의 실용을 위한 것이다. 당연히 벼를 심으라 할 줄 알았는데 다산은 반대로 말했다. 벼 심을 논을 넓혀 연을 심는 집안은 번창하고, 연 심었던 못을 돋워 벼 심는 집안은 쇠미해진다. 왜 그럴까? 인품의 차이 때문이다. 벼 몇 포기 더 심어 얻는 몇 말 쌀보다 연꽃을 감상하며 얻는 정신의 여유가 더 소중하다는 말씀이다.

 

다산은 서울 시절 마당에 국화 화분 수십 개를 길렀다. 길 가던 사람이 열매 있는 유실수를 심지 않고 어찌 아무 짝에 쓸모없는 국화만 기르느냐고 타박했다. 다산은 형체만 기르려 들면 정신이 굶주리게 된다며, 실용이란 입에 넣어 목구멍을 넘기는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실용만 따진다면 농사나 열심히 짓지 시는 무엇 하러 짓고 책은 어째서 읽느냐고 반박했다. 다산이 초의에게 준 필첩에 나온다.

세상은 온통 실용만 외치고 쓸모만 찾는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지속적으로 갈파한 다산의 가르침에서 인문 정신의 한 희망을 읽는다. 연을 심고 국화도 길러야 정신이 살찐다. 돈만 따지는 것은 오랑캐의 습속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01/20140401049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