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난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4월 15일 아침 느닷없이 천지를 진동하는 곡성에 휩싸였다. 깜짝 놀라 늙은 아전을 불러 영문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임진년 당시 왜적이 몰려와 이날 동래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살려고 성안으로 몰려든 백성들이 몰살을 당했습지요. 그래서 이날만 되면 살아남은 백성들이 집마다 상을 차려 죽은 이를 제사 지낸답니다."
이안눌은 이 일을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이란 장시에 담아 기록으로 남겼다. 다음은 아전의 설명 대목 중 한 부분이다. "'아비가 제 자식 곡을 하고요, 아들이 제 아비 곡을 하지요. 할아비가 손자 곡을 하고요, 손자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딸이 제 어미를 곡하기도 하지요. 지어미가 지아비를 곡하는가 하면, 지아비가 지어미를 곡한답니다. 형제나 자매를 따질 것 없이, 살아 있는 이는 모두 곡을 합지요.'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네.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父或哭其子, 子或哭其父, 祖或哭其孫, 孫或哭其祖. 亦有母哭女, 亦有女哭母. 亦有婦哭夫, 亦有夫哭婦. 兄弟與姊妹, 有生皆哭之. 蹙頞聽未終, 涕泗忽交頭. 吏乃前致詞, 有哭猶未悲. 幾多白刃下, 擧族無哭者.)
시인은 때아닌 곡성에 끔찍했던 만행의 그날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부르쥐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곡을 한다(有生皆哭). 하지만 곡할 사람조차 없는 집이 더 많다.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위정자는 책임 전가에 서로 바빴다. 그 와중에 임금은 백성을 남겨 놓고 한밤중 폭우 속에 황황히 피란길에 올 랐다. 방향 잃은 백성들만 우왕좌왕하다가 숱한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세상은 어쩌면 변하지를 않는가? 어디에도 없을 이런 지옥 속에서 고위 공직자는 사망자 명단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겠다고 포즈를 잡고, 선장은 아무 가책 없이 젖은 지폐를 꺼내 말렸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목숨 있는 이들의 곡성이 메아리친다. 아! 피어보지 못한 꽃다운 넋은 고이 잠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