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 3월 4일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가 강진 귤동으로 다산을 찾아왔다. 다산초당은 이때 이미 인근에 아름다운 정원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그는 영암군수로 내려온 아들의 임지에 머물다가 봄을 맞아 바람도 쐴 겸 해서 유람을 나섰던 길이었다. 고작 24세에 고을 수령이 된 아들이 못 미더웠던 이재의는 다산에게 아들이 지방관으로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몇 마디 적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다산은 '영암군수 이종영을 위해 써준 증언(爲靈巖郡守李鍾英贈言)' 7항목을 써주었다.
이 가운데 고을 관리가 법 집행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단계를 논한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글은 이렇다. "관직에 있으면서 형벌을 쓰는 데는 마땅히 세 등급이 있다[用刑三等]. 무릇 민사(民事)에는 상형(上刑)을 쓰고, 공사(公事)에는 중형(中刑)을 쓰며, 관사(官事)에는 하형(下刑)을 쓴다. 사사(私事)는 무형(無刑), 즉 형벌을 주면 안 된다(居官用刑, 宜有三等. 凡民事用上刑, 凡公事用中刑, 凡官事用下刑. 私事無刑可也)." 민사는 공무원이 백성을 등치거나 포학하게 굴어 이익을 구한 경우다. 가차 없이 엄하게 처리한다. 공사는 공무(公務) 수행상 실수를 범하거나 소홀히 한 경우다. 직분 태만의 벌이 없을 수 없다. 관사는 관장의 수행 인력이 보좌를 제대로 못 한 상황이다. 직무 소홀의 견책이 없을 수 없지만, 징계 수준은 가볍다. 사사는 사사로운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이때는 형벌을 쓸 수 없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한다.
민사상형(民事上刑), 공사중형(公事中刑), 관사하형(官事下刑), 사사무형(私事無刑)의 네 가지 단계가 있다. 못난 인간들은 꼭 반대로 한다. 비 서진을 제 몸종 부리듯 하고, 집안일과 공적인 일을 분간하지 못한다. 나랏일 그르치고 백성 등쳐 먹는 일에는 눈감아 주다 못해 같이 나눠 먹자며 추파를 던질망정, 체모에 손상이 오거나 챙길 수 있는 이익을 놓치는 것은 절대로 못 참는다. 여기에 무슨 위엄이 서며, 말을 한들 어떤 신뢰가 실리겠는가? 앞에서 '예예' 하고는 돌아서서 '에이, 도둑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