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도연명의 소요[이준식의 한시 한 수]〈25〉

bindol 2020. 9. 1. 10:47

飮酒 / 陶淵明

結廬在人境 결려재인경
而無車馬喧 이무거마훤
問君何能爾 문군하능이
心遠地自偏 심원지자편
採菊東籬下 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 유연견남산
山氣日夕佳 산기일석가
飛鳥相與還 비조상여환
此間有眞意 차간유진의
欲辨已忘言 욕변이망언

 

오두막집 마을 안에 짓고 살아도
시끄러운 수레 소리 들리지 않네
그대여 어찌하면 그리 돨 수 있소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땅도 절로 외진 법이라오
동쪽 울 밑에서 국화꽃 따는데
남산이 그윽하게 눈앞에 펼쳐지네
산기운은 석양에 곱기만 하고
나는새 무리 지어 돌아오네
이 가운데 참뜻이 들어 있음을
설명하려다 어느 새 말을 잊었네

 

 

사람 사는 마을에 수레나 말 따위의 소음이 없을 리 없다.
한데 세상 명리를 잊으니 市井의 거처조차 저절로 외진 세계가 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조차 멀어진다지만
시인은 육신의 행방과 무관하게 마냥 한갓지기만 하다.

 

심리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경계를 거리낌 없이
통섭하는 도가적 내공이 이런 것일까.


탐욕의 문을 걸어 잠그는 순간 국화며 남산이며 석양이며
새 떼를 오롯이 가슴속에 보듬어 안는다.

 

무욕의 逍遙에서 얻는 삶의 참맛,
이 생명의 逸樂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설명이 가능하기나 할까.


동쪽 울밑에서 국화꽃 따는데
남산이 그윽하니 눈앞에 펼쳐지네”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구다.

국화꽃 따던 시인이 문득 고개를 들어
그윽이 남산을 바라본다고 해석하면 무난할 것 같은데,

 

대문호 소동파의 해석은 좀 다르다.
시인이 우연히 고개를 드는 순간 남산이 ‘보인(見)’ 것이지
의도적으로 남산을 ‘바라본(望)’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윽함의 주체를 시인보다는 남산에 두었다.

기실 그 주체가 남산이든 시인이든 따질 건 없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 혹은 조화라는 자연철학으로 읽으면 될 터다.
조밀한 현대 도시의 무시무시한 속도와 분잡 속에서
한 번쯤 도연명의 어슬렁거림을 헤아려 봄 직하다.


-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