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인간사가 아무리 복잡해도, 한여름 날씨가 아무리 무더워도,
이런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깊은 산 속일 것이다.
그렇다고 산 속에는 여름이 비켜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가하고 평화로울 뿐이다.
깊은 산 속에서는 사나운 여름 무더위도 순하디 순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당(唐)의 시인 이함용(李咸用)은 이러한 여름 산 속을 면밀히 관찰하였다.
◈ 왕거사의 산속 집(題王處士山居)
雲木沈沈夏亦寒(운목침침하역한) : 구름 낀 나무숲 무성하여 여름이 차갑고
此中幽隱幾經年(차중유은기경연) : 이곳에서 지낸 지가 몇 년이나 되는지
無多別業供王稅(무다별업공왕세) : 남처럼 별장이 많아서 세금 낼 일도 없었고
大半生涯在釣船(대반생애재조선) : 반생을 고깃배를 탔었다네
蜀魂叫回芳草色(촉혼규회방초색) : 두견은 울어 향기로운 풀빛 새로 불러오고
鷺鷥飛破夕陽煙(로사비파석양연) : 해오라기 날아들며 저녁연기 깨뜨린다
干戈消地能高臥(간과소지능고와) : 전쟁이 그치면 베개 높이 베고 잠들 수 있건만
只個逍遙是謫仙(지개소요시적선) : 이런 중에도 소요하는 그대가 곧 신선이라오
※ 시인은 여름 어느 날 깊은 산 속을 찾았다.
그곳에 오랜 친구인 왕처사(王處士)가 은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산 속은 어찌나 깊고 높은지,
나무숲에 구름이 맞닿아 걸쳐 있고 울 나무들은 울창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런지 여름이지만 한기(寒氣)가 여전히 남아있다.
이렇게 깊숙한 곳에서 왕처사(王處士)는 홀로 떨어져 숨어 살며 몇 번이고 해를 보내고 있었다.
산에 들어오기 전에도 왕처사의 삶은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여기저기 커다란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별장들인데,
그에게는 이런 별장이 많지 않았고, 따라서 세금 낼 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반평생 이상을 낚시 배에서 지냈다.
그만큼 소박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그가 그마저도 속세의 일을 저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산 속에서 왕처사가 사는 모습은 물아일체(物我一體) 그 자체이다.
여름 새인 두견새가 울어 젖히면,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꽃다운 풀들이 흐드러지게 제 빛을 발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오라기가 날았다하면, 석양 속의 연기가 몇 조각으로 갈라진다.
어떠한 인위의 가미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 아닌가?
바깥 세상에서는 여전히 전쟁이다 뭐다 하여 골치 아픈 일이 한 둘이 아니라서
하루도 베개를 높이 베고 잠 잘 수 없지만,
이곳은 전쟁 같은 인간들의 극악스러운 일들이 얼씬도 하지 못한다.
세상의 번다함과 담을 쌓은 곳에서 소요하는 왕처사야말로
하늘에서 온 신선이라고 시인은 감탄해 마지않는다.
세상사 복잡하여 머리가 아픈데, 여기에 여름 무더위가 겹치면 사람들은 견디기 어렵다.
이럴 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보면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전쟁도 없고 다툼도 없다. 그리고 여름이지만 더위도 없다.
묵묵히 진행되는 자연의 질서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인간사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참된 생명의 의미를 새기게 되니,
여름날 깊은 산속은 단순한 은둔자의 도피처가 아닌 진정한 삶을 깨닫게 하는 도량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