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겨울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눈은 펑펑 내릴 때도 장관이지만,
그치고 해가 다시 났을 때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은 음산하고 침울했던 겨울의 모습은 눈을 통해 순진무구하고
청정한 세계로 극적인 탈바꿈을 한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눈과의 찰떡궁합을 자랑하곤 하는데,
여기에 갓 씻어낸 햇빛이 내려앉으면 눈은 세상의 어느 보석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찬란하다.
조선(朝鮮)의 시인 변계량(卞季良)은 눈이 그친 뒤의 풍광에 흠뻑 도취하였다.
◈ 눈이 개다(雪晴)
風急雪花飄若絮(풍급설화표야서) : 바람 급하니 눈꽃은 솜처럼 날리고
山晴雲葉白於綿(산청운엽백어면) : 산에 눈이 개니 구름 잎사귀 솜보다 더 희구나
箇中莫怪無新句(개중막괴무신구) : 와중에 새로 지은 시 없음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佳興從來未易傳(가흥종내미이전) : 예부터 좋은 흥취 쉽게 전하지 못한다하네
※ 눈이 내린 뒤의 세상은 그전과 확연히 다르다.
눈 내린 세상은 온통 눈 중심으로 돌아간다.
눈이 없을 때 바람에 날리는 것은 삭막한 먼지일 뿐이지만,
눈이 오고 난 뒤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겨울인지라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던 꽃들이 사방천지에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바람이라도 급하게 불면 그 모습이 마치 새로 타 놓은 솜과 같다.
이른바 설화(雪花)가 바로 이것이다. 눈이 내리다가 날이 개고나면,
산 위를 나는 구름도 여느 때와는 많이 다르다.
하나의 나뭇잎이 되어 하늘을 나는데 그 빛깔이 솜보다도 하얗다.
땅에 날리든 하늘을 날든 시인의 눈에 눈은 솜으로 보인다. 표표히 나는 거며,
하얀 거며 눈은 그대로 솜인 것이다.
눈이 개고 난 뒤 이처럼 황홀한 광경이면 사람들은 무조건 시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만,
막상 이러한 광경을 직접 목도한 시인은 의외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 말을 잊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시인도 할 말은 있다.
본인만이 아니고 옛날부터도 이렇게 훌륭한 풍광 앞에서
제대로 된 흥취를 표현한 사람은 없었지 않은가 말이다.
이 장면은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저녁 산의 황홀한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欲辯已忘言)고 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삭막한 겨울을 포근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눈이다.
눈은 곤궁하고 추운 겨울에 삶의 활력소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물질적으로 당장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산이고 들이고 할 것 없이 눈을 만났다하면,
그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곤 한다.
종래의 시인 묵객들은 이 황홀한 광경에 무수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가져다 붙였지만 아직도 흡족한 것이 없다.
아니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눈 내리고 난 뒤의 겨울 풍광은 사람의 언어로 감당하기에는 그 흥취가 너무도 깊고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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