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춘설 (春雪)

bindol 2021. 1. 4. 05:49

김태봉교수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신춘(新春)이나 신년(新年)이란 말에는

새로운 시작이나 출발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새로운 시작이나 출발이 있을 수 있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 것일까?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간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그저 흐를 뿐 시작이니 출발이니 하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시간에 ‘새롭다(新)’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처럼 새해니 새봄이니 하는 말은 그저 사람이 오랜 관습 속에서

편의상 하는 말버릇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고 그렇게 느낀다면,

이 또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唐)의 시인 한유(韓愈)가 새해를 맞이하여 느낀 소회는 참으로 감각적이다.

 

 

◈ 봄눈(春雪)

新年都未見芳華(신년도미견방화) 갓 새해엔 언제나 향기로운 꽃 아직 보이지 않고
二月初驚見草芽(이월초경견초아)이월에야 처음으로 풀싹을 보고 놀란다네
白雪嫌春色晩(백설각혐춘색만)흰 눈이 도리어 봄빛 늦음을 미워하여
故穿庭樹作飛花(고천정수작비화)그래서 뜰 나무를 뚫고 날아다니는 꽃이 되었다네

 

 

※ 여기서 새해는 물론 음력 새해이므로 양력으로는 보통 2월 중순 이후에 해당한다.

양력 새해보다는 봄에 가깝지만, 음력 새해 정초에도 언제나 아직 꽃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달 뒤인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풀싹이 보이는 것이 고작이다.

꽃이 아닌 풀싹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워낙 예기치 못했던 일인지라 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그것도 처음으로 말이다.

 

새해가 왔건만 도무지 봄은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 예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시인의 절망감은 뜻하지 않게 겨울의 상징인 흰 눈으로 그 불똥이 튀었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고 있는 흰 눈은 겨울의 무한함을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자신의 적수(敵手)인 봄이 늦게 오는 것이 밉다고 조롱하며 한껏 거드름을 피운다.

 

흰 눈의 거드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있는 한 봄은 오지 않을 것이고,

봄의 주인공인 꽃 또한 피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가 꽃이 되어 봄의 분위기를 연출하기로 한다.

그래서 뜰에 있는 나무들 사이를 뚫고 여기저기 흩날리는 것이니,

이쯤 되면 스스로가 꽃 노릇을 한 게 아니고 무엇이냐고 으스댄다.

여기까지 시의 겉을 살폈으니 이제는 시의 속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과연 시인은 봄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흰 눈의 세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정답은 둘 다이다.

새해를 맞이한 시인에게 향기로운 꽃(芳華)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할 말은 도(都)와 미(未)이다.

 

도(都)는 모두라는 뜻으로 시인이 맞은 새해가 여러 차례였고

그 때마다 모두 꽃이 없었음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음의 미(未)는 부정사(否定詞)지만 여느 부정사(否定詞)와는 뜻이 다르다.

 

아직은 아니라는 것은 얼마 안 있어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未)의 함의는 부정(否定)이 아니라 긍정(肯定)이다.

그것도 확신에 가까운 긍정(肯定)이다.

새해 정초엔 매번 꽃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푸념했지만, 사실은 푸념한 게 아니다.

 

여러 차례 새해에 대한 경험을 통해 봄이 곧 올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짐짓 봄이 아득하다고 배부른 투정을 하는 시인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와도 같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절망감이지만, 그 속에는 기대감이 숨어 있다.

뜰 안의 나무 사이로 흩날리는 눈이 봄이 늦음을 미워해 꽃이 되었다고 한 것도

사실은 시인의 성급한 기대감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눈에 마당의 흰 눈은 화사한 봄꽃으로 보이니 말이다.

새해가 된 순간 봄은 머지않다. 머지않아 뜰엔 흰 눈 대신 봄꽃이 만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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