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어느 가을날의 상념

bindol 2021. 1. 5. 05:51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은 계절만이 아니다. 인생에도 가을은 있다.

초로(初老)의 나이인 오륙십이 인생으로 치면 가을이다.

보통 이 나이가 되면 어느 직장에서건 현업(現業)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고,

동시에 곧 닥칠 노후(老後)에 대한 불안이 엄습한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건만, 이룬 것은 거의 없고,

앞으로 할 일도 변변치 않은 것이 이 나이 사람들의 흔한 모습이다.

상념의 계절 가을이 되면, 이들의 시름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탕(唐)의 시인 바이쥐이(白居易)도 예외는 아니었다.

 

 

◈ 가을 저녁 시골집에서 시름을 적다(秋暮郊居書懷)

郊居人事少(교거인사소) : 성 밖 집에 사람 왕래 드물고
晝臥對林巒(주와대림만) : 낮인데도 누워서 산을 바라보네
窮巷厭多雨(궁항염다우) : 곤궁한 동네는 비 많은 게 싫고
貧家愁早寒(빈가수조한) : 가난한 집은 이른 추위가 걱정이네
葛衣秋未換(갈의추미환) : 갈포 옷을 가을에도 못 바꿔 입고
書卷病仍看(서권병잉간) : 서책은 병들어도 여전히 읽고 있네
若問生涯計(야문생애계) : 만약 여생의 계책을 묻는다면
前溪一釣竿(전계일조간) : 앞개울에 낚싯줄 드리우는 것이라네

 

 

바이쥐이(白居易)는 평생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야 관직을 떠났으니

평생 은퇴를 모르고 살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강주(江州), 항주(杭州), 소주(蘇州) 등 지방으로 떠돌기도 하였으며, 중앙에서도 한직에 머문 적이 많았다.

이 시는 시인이 한직에 머무를 때, 장안성(長安城) 밖 교외에 집을 짓고 살면서

가을을 맞이하여 느낀 소회를 적은 것이다.

성(城) 안이 분주하고 복잡한 공간임에 비해 성 밖인 교외(郊外)는 한가하고 단순한 공간이다.

시인이 교외에 지은 집(郊居)에 머무는 것은 중앙 관직의 현업(現業)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업에 있을 때는 그렇게 많던 사람들의 왕래가 뚝 끊긴 것이다.

평소 바쁜 생활을 하던 시인에게 한가함이란 상당히 낯선 것이다.

대낮인데도 방에 누워 앞산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에 낯 설은 한가함이 잘 담겨 있다.

한참 일 할 나이에 갑작스레 현업을 떠나게 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시인의 이러한 모습에 쉽게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한가함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다.

성 안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는 실감하지 못했던 서민의 생활을 몸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곤궁한 살림을 살다보면 비만 오면 지붕 새기가 일쑤이니 비 많은 것을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더위는 그럭저럭 버텨 낼 만하지만 추위는 견디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가난한 집은 추위가 빨리 찾아오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시인은 궁벽한 마을에 사는 가난한 백성과 처지가 다를 바 없다.

시인은 궁벽(窮僻)과 가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겪어낸다.

칡껍질을 얽어 만든 갈포(葛布) 옷은 그 자체로 가난을 상징한다.

무더운 여름에 이 옷을 입는 것도 서러운데,

추운 가을에까지 이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형편은 어떠했을 지 충분히 알 만하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푸념하기 보다는 괘념치 않기로 한다.

몸이 멀쩡할 때 읽던 서책을 병이 났는데도 놓지 않는 시인은

가난뿐만 아니라 병마(病魔)마저도 모른 체 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시인에게 가난과 병마(病魔)는 문제될 게 없다.

그 비법(秘法)은 바로 한가함을 즐기는 것이다. 현업을 떠난 지금,

여생을 앞개울에서 낚시를 하며 보내겠다는 시인의 다짐은 이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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