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비 갠 후에

bindol 2021. 1. 5. 06:13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아무리 과학 문명이 발달했다 해도 자연의 거대한 힘을 당해 낼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힘이 가장 센 대통령이 아무리 4대강 사업 덕에

가뭄 홍수 걱정 덜었다 외쳐 봐도,

말없는 자연이 내린 가뭄과 홍수 앞에서는 그 말이 공허할 수밖에 없다.

두 달 넘게 가물다가 내린 비는 반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비가 해갈(解渴) 수준을 넘어 홍수로 이어지면

이제는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인심이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끝 모르고 내리던 비가 그쳤을 때,

사람들은 십년체증이 사라진 것처럼 산뜻한 기분이 든다.

 

탕(唐)의 문장가 류쭝위앤(柳宗元)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름 첫 비 내린 뒤 시내를 찾아(夏初雨后尋愚溪)


悠悠雨初霽(유유우초제) : 끝 모르고 내리던 비 개자마자
獨繞淸溪曲(독요청계곡) : 맑은 시내 굽이를 혼자서 돌아보네
引杖試荒泉(인장시황천) : 지팡이 끌고 잡초 우거진 샘에 가서 물 한번 마셔보고
解帶圍新竹(해대위신죽) : 허리끈 푼 채로 새로 자란 대나무 숲을 둘러보네

沈吟亦何事(심음역하사) : 마음 속 근심 읊어 낸들 또한 무엇 하리?
寂寞固所欲(적막고소욕) : 말없이 고요함이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이네
幸此息營營(행차식영영) : 다행히도 여기서 번잡한 인간사 그만두고
嘯歌靜炎욱(소가정염욱) : 노래를 읊조리니 찌는 듯한 더위도 잠잠해지네

 

 



장마를 겪어 본 사람은 다 안다. 비가 얼마나 지겨운 가를.

불과 한 달 전에 비를 학수고대하던 사람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나 비가 오래 왔기에 아득하여 끝을 모른다(悠悠)고 했을까?

그런 비가 이제 막 그쳤으니(初霽) 반갑기가 이를 데 없다.

사실 시인은 줄곧 비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가 좋아서가 아니라,

비 그치기를 기다려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비 때문에 가보지 못했던 맑은 시내굽이 돌아보기이다.

비가 와서 결코 맑을 수 없겠지만,

이것을 맑다고 표현한 것은 비 갠 것이 반가운 시인의 심리 상태가 반영된 결과이다.

비 그치면 가고 싶은 곳은 맑은 시내굽이만이 아니었다.

오랜 비로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잡초가 무성해졌을 샘(荒泉)에도 가봐야 하고,

오래 못 보는 동안 훌쩍 자랐을 대나무 숲도 가봐야 했다.

지팡이를 끈다거나(引杖), 허리끈을 푼다거나(解帶 )하는 것은

속세를 떠난 은자(隱者)들의 일반적인 행태라는 것을 감안하면,

지리한 장마는 은자(隱者)의 생활에도 상당한 저해가 됨을 알 수 있다.

침음(沈吟)은 마음의 울분을 시로 토로한다는 뜻인데,

이미 속세를 떠난 시인에게는 세상사에 대한 울분 따윈 이미 잊혀진 지 오래다.

시인이 바라는 것은 어떠한 다툼에도 끼지 않고

조용하게 사는 것임을 비갠 후 나들이에서 다시 한 번 다잡는다.

권세며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營營)을 멈출 수 있는 곳,

노래 읊조리면 무더위가 가시는 곳, 시인은 그곳에 있어 마냥 행복하다.

끝이 없는 장마는 없다. 비 갠 후에 느끼는 상쾌함은

오랜 비의 지루함을 견뎌 낸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을 새긴다면,

지금 사람의 마음에 내리는 장마도 잘 견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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