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소쇄원 설경

bindol 2021. 1. 5. 07:48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전라남도 담양에 가면 유서 깊은 정원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은 소쇄원(瀟灑園)이다.

조선 중기 정치적으로 실의를 겪은 양산보(梁山甫)라는 사람이

낙향하여 은둔지로 꾸민 정원인데, 자연의 모습을 잘 살린,

졸박하지만 격조 있는 품격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이 정원을 수시로 드나들던 시인 김인후(金麟厚)가

이곳의 정경을 48수의 시로 묘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눈 덮인 풍경에 대한 것이다.


 

뜰에 깔린 눈(平園鋪雪)

不覺山雲暗(불각산운암) 산 구름 어두운 걸 몰랐는데
開牕雪滿園(개창설만원) 창을 여니 눈이 뜰에 가득하네
階平鋪遠白(계평포원백) 섬돌에도 두루 하얀 눈 쌓이니
富貴到閑門(부귀도한문) 부귀가 한가한 문에 이르렀구나.

 



소쇄원은 자연을 잘 살리기는 했지만, 엄연히 사람의 의도가 반영된 공간이다.

여기에는 실제 용도가 아닌 장식용의 담장도 있고 마당도 있다.

이 정원의 주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시인은 이곳을 사시사철 수시로

드나들며 그 풍광을 시로 읊고 있던 터였다.

겨울 어느 날도 시인은 평소처럼 이곳을 찾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풍광에 별다른 감흥 없이 방에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무심코 창문을 열어 본 시인은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그새 눈이 제법 내려 마당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방에 들 때 산 구름이 어두워지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않은 설경에 시인의 시흥이 발동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계단이며 마당에 똑같은 두께로 평평하게 눈이 쌓인 모습에서,

시인은 역설적으로 세속의 부귀를 떠올린다. 부귀를 피하려는

한가로운 집(閑門)에 도리어 부귀가 제 발로 찾아든 격이다.

소쇄원처럼 유서 깊지 않아도 된다.
흔하고 평범한 산야나 강에서도 겨울이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부귀가 있다.

세속적 부귀에 짓눌려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진짜 부귀는 따로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풍광이 있으니,

소쇄원의 마당에서 느닷없이 만난 눈 같은 것이 그것이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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