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초 외교난맥에 빠진 정부 한미 FTA, 미국 쇠고기 수입처럼 국내정치·포퓰리즘 수렁 벗어나야
조 바이든 행정부 첫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지명된 ‘외교 천재’ 제이크 설리번은 신년 초 CNN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중산층에게 이익이 되는 국제질서를 구축할 것이고 그런 면에서 외교정책=국내정책이란 얘기였다. 자신감이 넘쳤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떠올랐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 역시 지난 대선에서 7440만여명의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바이든 당선인은 바로 그 정책 때문에 미국의 국익이 손상됐다고 비난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건 내년이 대선의 해고, 오는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있어서다. 표만 된다면 국익과는 상관없이 한 편은 일본과 미국을, 다른 편은 북한과 중국을 때리는 시즌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연말 연초 코로나19 확산과 뒤늦은 백신 확보, 부동산정책 혼선, 추미애-윤석열 갈등 속에서 우리가 놓친 건 문재인 청와대가 처한 딱한 외교안보 정세다. 오매불망했던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한과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는 코로나19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북핵 문제를 바이든 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우선순위로 두게 하려던 정부 구상은 ‘대북전단 금지법’을 처리하면서 첫인상만 잔뜩 구겼다.
서소문 포럼 1/19
일본과 협력해 7월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평창 시즌 2’를 재현하겠다는 ‘희한한’ 구상은 한·일 위안부 합의 불이행,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법원의 일본 정부 위안부 배상 판결로 그로기 상태다. 최근 사례는 이란의 한국 유조선 억류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핵 합의 파기 이후 샌드위치 신세였던 한국은 2년여 동안 위기관리를 제대로 못 해 급기야 억류 사태를 맞았다. 대표단을 파견해 수습에 나섰지만 ‘미국을 설득하라’는 말만 들은 채 아니 간만 못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무엇 하나 구상대로 진행되긴커녕 번번이 뒷다리가 앞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있다. 지난 임기 3년 8개월 국내정치 유불리를 따지고 지지자를 의식하거나 인기에 영합한 외교안보 정책 결정이 남은 임기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사방에서 옥죄고 있는 형국이다. 역대 어느 정부가 국내정치와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자유로웠을까. 문재인 청와대를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하지만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인 올해, 문 대통령은 이제 레거시(유산)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에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과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을 떠올려본다. 추진 배경과 시점, 실현되기까지 우여곡절은 다르지만 노·이 두 대통령의 결단은 지지층 또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노 대통령 시절 협상을 타결했고, 이 대통령 시절 국회를 통과한 한·미 FTA는 이후 한국을 전 세계 국가 중 무역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로 만들었다. 국민의 일자리는 풍성해졌다. ‘미국이 더 손해’라는 집권 초 트럼프 대통령의 파기 협박에도 문 대통령이 뚝심으로 지켜낸 바로 그 협정이다.
이 대통령은 2008년 노 대통령이 미국에 약속해놓고도 결단을 주저했던 미국산 소고기 수입 결정으로 취임 6개월 만에 지지도가 10%대로 급락했다. 수개월간 이어진 광화문 촛불집회에도 추가 협상을 통해 수입 결정은 유지했고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미국의 신뢰를 얻었다. 그 결과는 그해 말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한국을 ‘제2의 IMF 위기’로부터 구해낸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이었다. 대통령 탄핵 사태와 적폐 청산의 구호 속에서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전임자의 수고’를 가장 기억하지 않는 정권이 됐다. 어느 정권 하나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정권이 없다. 또 그 전임자의 수고 덕분에 국민은 밥을 먹고 국가는 편안할 수 있다. ‘국내정책이 외교정책’이라는 설리번의 말은 세계 질서를 만드는 초강대국 미국이어서 가능한 말이기도 하다. 중견국 한국의 국내정책이 외교안보정책일 수 없는 이유다. 때론 국익을 위해 국내정치 유불리를 생각 안 하고 지지층을 설득해내야 한국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그런 나라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마지막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퇴임을 1년여 앞둔 문재인 정부도 이제 ‘전임자의 수고’를 해주기를 바란다. 문 대통령은 무엇을 외교안보 유산으로 남기려는가.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