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5〉
일본 관동군에게 점령당한 후, 간판마저 없어진 동3성병공창. 1931년 가을 펑톈. [사진 김명호]
1922년 4월 28일, 즈펑(直奉)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즈파의 승리였다. 즈파 영수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의 기세는 구름을 뚫고도 남았다. 의기양양하게 펑파 사령부 소재지를 시찰했다. 톈진(天津)에 도착하자 진풍경이 벌어졌다. 저명인사와 외교사절이 줄을 이었다. 전 동3성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조이손)이 충고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예사 인물이 아니다. 최정예 사단은 이번 전쟁에 내보내지 않았다.”
즈군 맹공 뚫고 동3성 온 장쭤린
장쉐량에게 정전협상 임무 맡겨
미·영, 내전 불간섭 내세워 거절
미국인 목사들이 나서 정전 합의
장쭤린 삼고초려로 왕융장 복직
중공업·군수산업 육성에 안간힘
우페이푸는 승리에 들떴다. 조롱으로 응수했다. “장쭤린을 발탁한 사람이 바로 너다. 비적들이 나라를 어지럽힌다. 네 책임이 크다. 장쭤린은 적장이 아니다. 토벌 대상이다. 내빼는 바람에 숨통을 끊어버리지 못했다.” 시 한 편으로 일본과 결탁한 장쭤린을 약 올렸다. “북녘땅 만주를 보노라니, 보하이만(渤海灣)에 풍랑이 거세다.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랴오닝(遼寧)은 인민의 안식처. 창바이산(長白山)에 울타리 치고 헤이룽강변에 성곽 쌓아, 왜구의 머리에 철퇴를 날리겠다.”
즈파 영수 우페이푸는 승리에 기세등등
자치를 선언한 장쭤린은 정보경찰을 육성, 공산당 색출을 지시했다. 승려로 위장한 정보경찰. 1923년 가을 펑톈 경찰총국 문전. [사진 김명호]
장쭤린은 동3성이라는 확실한 근거지가 있었다. 즈군의 맹공을 저지하며 산하이관(山海關)에 도달하자 숨을 돌렸다. 관 밖은 동3성, 장쭤린의 천하였다. 펑톈(奉天)으로 돌아온 장쭤린은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불렀다. “사생결단은 미련한 것들이 하는 짓이다. 정전을 논의할 때가 됐다. 경험이 중요하다. 직접 처리해봐라. 저 망할 것들이 요상한 무기로 우리를 압박했다. 배후가 어딘지도 확인해라.”
장쉐량은 펑톈 주재 미국 영사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내전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미 양국의 우페이푸 지원을 확인한 장쉐량은 기독교청년회(YMCA)를 동원했다. 미국인 목사 두 명이 개인 자격으로 산하이관 전선을 찾았다. 산하이관 일대는 여전히 전쟁터였다. 양측 모두 3000여 명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다. 즈군 지휘관은 미국인 목사의 제안을 전선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6월 16일 자정, 친황다오(秦皇島)역 대합실에 장쉐량과 미국인 목사가 나타났다. 영국인 역장실에서 우페이푸의 특사와 정전에 합의했다.
동북왕 장쭤린의 공식 직함은 동3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였다. 베이징의 북양정부는 허깨비였다. 미국과 영국의 입김을 피할 힘이 없었다. 요구대로 장쭤린을 파면했다. 병력 7만과 군비 3000여 만원을 날려버렸지만, 장쭤린의 원기(元氣)는 손상되지 않았다. 동3성 독립선포로 응수했다. “우방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청 황실과 중화민국이 체결한 조약은 승인하고 준수한다. 차후에 벌어질 모든 교섭은 동3성 보안총사령부가 담당한다. 베이징 측이 동3성, 몽골, 러허(熱河), 차하르(察哈爾)와 맺은 조약은 총사령관의 윤허를 거치지 않았다. 승인할 수 없다.”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워싱턴회의에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고립시켰다. 일본은 내놓고 장쭤린을 지지하지 못했다. 우페이푸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승리했다. 펑톈 측 실패의 중요 원인이다. 동북으로 철수한 장쭤린이 자치를 선언하자 서남과 창장(長江)유역의 군벌들이 호응했다. 남방의 혁명세력을 대표하는 쑨원(孫文·손문)은 북벌을 선언하며 열강의 내정간섭을 경고했다. 효과는 미지수다. 현재 중국을 통일시킬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은 우페이푸다.” 장쭤린의 심기를 건드리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서남·창장유역 군벌은 장쭤린에 우호적
내전이 계속되자 청년들은 전쟁에 나가고, 노인과 아동들이 생활 전선에 나섰다. 전쟁 시절 펑톈 거리의 반찬가게. [사진 김명호]
전비 지출로 왕융장(王永江·왕영강)의 곳간은 바닥을 쳤다. 병을 핑계로 재정청장을 사직했다. 장쭤린이 부르자 약장사나 하겠다며 펑톈을 떠났다. 장쭤린이 삼고초려하자 조건을 제시했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동3성 건설에만 매진한다. 군비는 현재 수준을 유지한다. 군·정을 분리시킨다. 군인은 행정에 관여할 수 없다. 총을 지참한 군인들이 정부에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엄금시켜주기 바란다.” 듣고 보니 별것도 아니었다. 즉석에서 수락했다.
왕융징은 장쭤린을 안심시켰다. “동3성은 천혜의 보고다. 땅속에 없는 것이 없다. 부질없는 전쟁에 휩쓸리지 않으면 동양 굴지의 중공업과 군수산업기지로 만들 자신이 있다.” 왕융장은 약속을 지켰다.
방직공업부터 육성했다. 이민 오겠다는 기술자를 우대했다. 2년 만에 동3성에 진출한 일본 방직공장을 도산시켰다. 군수산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3성병공창의 무기 생산라인이 4㎞에 달했다.
1931년 9월 중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동3성병공창에 진입한 일본군은 입이 벌어졌다.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중국인 학살에 사용한 무기의 40%가 동3성병공창 제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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