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9〉
1912년 1월 1일 밤에 열린 쑨원의 임시 대총통 취임식은 야간 촬영시설 미비로 영상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서화에 능한 동맹회 회원 위안시뤄(袁希洛)가 당시 기억을 더듬어 참석자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 근대사에 베이징정변(北京政變)이 세 번 등장한다. 1861년 10월, 26세의 서태후 즈시(慈禧·자희)가 시동생과 손잡았다. 권신 수쉰(肅順·숙순)을 제거하고 탈권(奪權)에 성공했다. 37년 후, 즈시가 또 일을 벌였다. 황제 주변에 얼쩡거리는 개혁파들에게 철퇴를 가하고 황제의 권력을 솜방망이로 만들어버렸다. 즈시 태후가 일으킨 두 차례 정변은 궁중의 권력 암투였다. 형장 주변에 몰려온 구경꾼과 망나니들의 칼춤만 요란했다.
청나라 황실의 부패·무능에 실망
즈파 군벌 출신으로 쿠데타 성공
쑨원, 펑위샹 거사를 의거로 평가
덩샤오핑 “펑 장군은 평생 애국자”
즈펑전쟁 승리자 장쭤린에 일격
베이징 정국은 오리무중 속으로
세계 언론, 정변 성공한 펑위샹 주목
항일전쟁 승리 후 펑위샹은 중국을 떠났다. 부인 리더촨(李德全)과 미국에 머무르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1946년 11월, 뉴욕 센트럴파크. [사진 김명호]
1924년 10월 하순, 2차 즈펑(直奉)전쟁이 치열할 때 발생한 베이징정변은 달랐다. 즈파군벌의 일원인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이 즈파가 장악한 중앙정권을 무너뜨린, 전형적인 쿠데타였다. 세계의 언론매체가 베이징을 장악한 펑을 주목했다. 오보가 대부분이었다. 1999년 9월, 타이베이 교외의 온천장에서 펑위샹과 한솥밥 오래 먹은 참모의 막내아들이 재미있는 구술을 남겼다. “펑 장군은 옹색한 하급장교의 아들이었다. 정규교육은 못 받았다. 1년 3개월간 서당 출입이 다였다. 어릴 때부터 교회만 열심히 다녔다. 먹고살기 위해 12살 때 군적에 이름 올리고 7년간 사병생활을 했다. 187㎝의 큰 체격에 틈만 나면 독서에 열중했다. 사격까지 백발백중이다 보니 상관들 눈에 들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오른팔 루젠장(陸建章·육건장)에게 예쁜 처조카가 있었다. 루 장군은 펑위샹을 총애했다. 1905년 봄, 직접 나서서 처조카와 결혼시켰다. 쑨원(孫文·손문)이 동맹회 기관지에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발표할 즈음이었다.”
결혼과 함께 펑위샹의 위상도 달라졌다. 처삼촌 덕에 좋은 보직을 도맡아 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군 생활 하다 보니 뇌리에 충군(忠君) 사상이 가득했다. 광시제(光緖帝)와 즈시가 병사하자 기이한 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3일 밤낮을 한자리에 앉아 통곡만 해댔다.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안 잤다. 충성심보다 엄청난 체력에 감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부하가 늘어나자 세상 보는 눈이 밝아졌다. 하늘처럼 알던 청나라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실망했다. 동료들과 무학연구회(武學硏究會)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었다. “우한(武漢)이 시끄러우면 온 중국이 시끄럽다”는 옛말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1911년 10월 10일, 군사 요충지 우한삼진(武漢三鎭)에 주둔 중인 남양신군(南洋新軍)이 혁명군 깃발을 내걸었다. 펑위샹이 이끌던 무학연구회도 호응을 모의했다. 1911년 1월 1일 0시 정각,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거사는 이틀 만에 실패했다. 펑은 체포됐지만 루젠장의 인척이라 금세 풀려났다. 군 복직도 별문제가 없었다. 3년간 근신하며 경력을 쌓았다. 든든한 자산이 될 여단장이 되자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쑨원은 펑위샹의 거사를 의거(義擧)라며 높이 평가했다. 인편에 박애(博愛) 두 글자를 휘호해서 보냈다.
국민군은 1927년 4월 말, 국민혁명군에 편입됐다. 흔히들 서북군이라 불렀다. 국수 먹는 서북군 사병. [사진 김명호]
펑위샹의 모병과 군사교육은 특색이 있었다. 낙후된 지역에만 모병관을 보냈다. 손에 돌덩이 같은 굳은살 박인 농촌 청년이 아니면 뽑지 않았다. 훈련은 엄격했다. 야간전투와 육박전, 행군은 가혹할 정도였다. 사병 출신이다 보니 군대의 적폐와 사병들의 심리를 잘 알았다. 같은 밥 먹고 잠자리도 허술했다. 장교들은 죽을 노릇이었다. 옛 부하의 회고록 일부를 소개한다. “펑 장군은 싸구려 옷과 거친 음식이 몸에 밴 지휘관이었다. 금연과 도박을 금지하고, 툭하면 금주령을 내렸다. 예하 지휘관이나 참모들은 비단옷 걸칠 엄두를 못 냈다. 여관 출입이나 외국 물건 좋아하다 몽둥이찜질 당한 측근이 한둘이 아니었다. 훗날 산둥(山東)성 주석을 역임한 한푸쥐(韓復榘·한복거)는 사소한 실수로 부하들 앞에서 각목 세례를 받았다. 심복 쑹저위안(宋哲元·송철원)은 더했다. 몰래 술 마셨다는 이유로 실신할 때까지 가죽채찍으로 얻어맞았다. 장군은 힘이 장사였다. 무거운 역기를 장난감처럼 다뤘다. 부하들 사이에 별명이 여포(呂布)였다. 항우(項羽)가 환생했다고 쑤군대는 사람도 많았다.”
펑위샹은 정신교육을 중요시했다. 모아놓고 직접 시켰다. 3시간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1975년 타이완에서 사망한 전 국민당 육군상장(上將) 류루밍(劉汝明·유여명)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국민당 이끈 쑨중산 혁명사상 옹호
“펑위샹은 봉건사상과 농민의식이 묘하게 뒤섞인 복잡한 사람이었다. 군사훈련보다 정신교육에 더 치중했다. 타고난 무골이다 보니 명확한 정치관이 있을 리 없었다. 훈시 내용이 산만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봉건적인 윤리와 도덕, 애국을 강조했지만 애국에 대한 설명은 수시로 달랐다. 박애와 희생을 역설할 때는 기독교 목사 같았다. 군관 상대로 특강을 세 차례 했다. 효도와 애민(愛民), 보불전쟁 때 프랑스 국민의 애국적인 행동이 주제였다. 내용이 어수선하고 앞뒤가 안 맞았다. 당시에는 참 별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풍파 겪으며 많은 사람 만났지만 애국이 뭔지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애국은 실천이라는 것을 깨닫자 말이 생각을 따르지 못했던 장군이 그리웠다. 덩샤오핑(鄧少平·등소평)은 펑 장군의 일생을 애국자라는 한마디로 정의했다. 맞는 말이다. 장군은 죽는 날까지 애국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베이징정변에 성공한 펑위샹은 즈파와 결별했다. 군대 명칭도 중화민국국민군(中華民國國民軍)으로 바꿨다. 외국 기자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정변이 아닌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쑨중산 선생의 혁명사상을 옹호한다. 선생을 베이징으로 모셔 오기 위해 동지들과 수도혁명을 단행했다. 중산 선생은 국민당의 영도자다. 우리의 대오도 국민군이 당연하다. 선생은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당과 연합했다.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통일을 위한 혁명군 양성에 돌입했다. 국민군과 합세할 날이 머지않았다.”
즈펑전쟁의 승리자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어이가 없었다. 정국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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