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석 사회에디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다 보면 광활한 홍토지(紅土地)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평선을 꿰뚫을 듯이 날카롭게 솟아있는 초대형 비석 모양의 붉은 사암 기둥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역마차’(1939) ‘수색자’(1956)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 등 서부 영화의 단골 배경으로 익숙한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다.
미국인의 ‘마음의 고향’인 이곳은 역설적이게도 존 웨인과 같은 백인의 총에 무수히 쓰러졌던 북미 원주민, 그중에서도 나바호족(族)의 터전이다. 7만1000㎢에 이르는 미국 최대 원주민 보호구역 ‘나바호 자치국’(Navajo Nation)이 이 신령스러운 공간을 품고 있다. 나바호족 인구는 자료에 따라 9만~20만명까지 들쭉날쭉하지만, 미국 내 원주민 부족 중에서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이들이 만들어 나바호 러그(Rug)로 불리는 직물 깔개는 북미 원주민의 예술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부족은 한때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차 대전 때의 ‘코드토커’(code talkers) 활동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의 ‘무선통신 해킹’을 방지하기 위해 미군은 나바호족 고유 언어로 암호를 만들었고, 나바호 용사들이 이를 활용해 암호통신병으로 활약했다. 탱크는 나바호족 언어의 ‘거북이’에 해당하는 말로 불렀고 기관총은 ‘재봉틀’로 지칭했다. 나바호족이 등장한 이후 일본군은 미군 통신을 예전처럼 쉽게 해독할 수 없었다. 우위썬(吳宇森) 감독이 이 내용을 소재로 영화 ‘윈드토커’(2002)를 만든 이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나바호족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마지막 암호통신병’ 체스터 네즈(1921~2014)를 비롯해 800여명의 나바호족이 6·25 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인을 위해 고귀한 피를 흘렸다.
민관 합동 조직인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가 나바호족 참전 용사들에게 마스크 1만장과 손 소독제 등 방역물품을 지원하기로 했다. 소박한 보은이지만 시점이 좋다. 나바호 자치국이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1인당 감염률 최상위권 지역이라는 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라서다. 지원받는 입장에서는 두보(杜甫)가 읊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처럼 반가운 지원일 것이다. 우리 국민의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이 넉넉하게 전달되리라 기대해본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분수대] 나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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