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분수대] 공수처(公搜處), 공수처(空手處)[출처: 중앙일보]

bindol 2021. 1. 30. 18:04

박진석 사회에디터

 

명명(命名)의 중요성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한자어의 비중이 큰 탓에 동음이의어로 언어유희를 즐기기 좋은 한국어의 경우 더욱 그렇다. 큰 고민 없이 이름을 안이하게 붙였다가는 패러디와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유난히 간판을 자주 갈아치우는 정당과 정부 부처들도 새 이름을 짓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은 ‘더불당’, 자유한국당은 ‘자한당’이라는 비호감형 약칭으로 불리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지난 정부 때의 미래창조과학부는 미창과부, 미과부, 미창부, 창과부 등 예비 약칭들의 어감이 모두 좋지 못해 고민하다가 결국 안전한 미래부를 선택했다. 반면 안전행정부는 ‘안행부’ 사용을 강행했다가 ‘안 행복한 부처’라는 놀림에 시달렸다.

2003년 서울지검 형사9부는 금융수사부로 개명하려다가 ‘금수부’로 불리게 된다는 점 때문에 금융조사부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공수처’라는 약칭을 확정하기까지 몇 차례 우여곡절을 거쳤다. 본격적으로 도입 논의가 시작됐던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줄인 ‘공비처’가 대세였다. 하지만 무장공비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슬그머니 ‘고비처’로 바꿨지만 이번에는 고위공직자들이 ‘고(高)’자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 공수처가 간택을 받았다.

하지만 태생 자체가 논란이었던 탓에 공수(公搜)처 역시 이름 때문에 놀림감이 되는 운명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칼날을 마구 휘둘러대면 피의자 측은 분명 공수병(恐水病·광견병)을 차용해 공수(恐水)처로 바꿔 부를 것이다. 수사에서 연방 실패만 하면 공수(空搜)처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만하다. 공수(空手)처로 불리게 되면 정말 곤란하다. 사건을 받아간 손이 어느 순간 텅 비어있을 경우, 다시 말해 정권 비리 의혹 사건을 이첩받아 뭉갤 경우에 등장할 수 있는 단어라서다. 검찰과 야당에서 제기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기도 하다.

초대 공수처장이 될 분은 유념해주길 바란다. 20년 산고 끝에 탄생한 ‘슈퍼 수사기관’의 수장이 ‘빈손 처장’이란 말을 듣는 건 개인의 치욕을 넘어 국가의 비극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분수대] 공수처(公搜處), 공수처(空手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