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대학의 삼강령과 팔조목

bindol 2021. 3. 5. 09:50

  

大學의 三綱領 八條目 三綱領八條目 주자는
대학은 옛날 太學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법이다하여
明明德.新民.止於至善을 三綱領으로 하고,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八條目이라하여,
君上의 修己治人之術을 밝힌 政治書로 중시하였다.

 

또한 ‘古本大學’은 編次가 뒤바뀌어 빠진 부분이 있다는 曾子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절차를 다시 정하고 새로이 격물치지장을 지어 넣기도 하였다.
明代에 이르러 王陽明이 古本大學의 정통성을 강조하였고,
淸代의 考證學者들이 수용하여 “주자가 聖經을 어지럽혔다”는 批判을 가하였다.

 

茶山 丁若鏞도 ‘大學公議’를 지어 고본대학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자의 四書集註을 絶對信奉하였으며,
이것이 朝鮮朝 性理學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대학의 삼강령과 팔조목은 학문과 정치의 필수적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도통계보도: 伏羲 神農 黃帝 堯 舜(皐陶) 禹 湯(伊尹 傅說) 文王 武王(周公)
孔子 曾子(顔子) 子思 孟子 周子 程伊川(程明道) 朱子

 

三綱領:明明德 新(親)民 止於至善 八條目: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讀大學法 대학은 앞뒤가 서로 因하여 體統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이 책을 玩味하여 옛 사람이 학문함에 향하였던 바를 알고
論語와 孟子를 읽으면 곧 들어가기가 쉽다.

 

대학은 다만 統合하여 말씀하였으니, 그 功用의 지극함을 논한 것이 天下를 平함에 이른다.
대학을 통달하고 다른 경서를 보아야 비로소 이것이 格物.致知의 일이며
이것이 誠意.正心의 일이며 이것이 修身의 일이며
이것이 齊家.治國.平天下의 일임을 보게 될 것이다.

 

大學章句序 사람이 태어날때는 누구나 仁義禮智의 性을 賦與받았으나
그 氣質을 받은 것이 똑같지 못하여,
그 본성의 소유함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바 이에 太學을 설치하여 단 한명이라도
聰明하고 叡智하여 능히 그 本性을 다한 자가 그 사이에서 나와 億兆蒼生의 君主와
스승이 되어 본성을 회복하게 하는데 司徒의 직책을 설치한 이유다.

 


1.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明德者는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하여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
但爲氣稟所拘와 人欲所蔽면 則有時而昏이라 然이나 其本體之明은 則有未嘗息者라
故로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하여 以復其初也라 新者는 革其舊之謂也니
言 旣自明其明德이면 又當推而及人하여 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也라

 

止者는 必至於是而不遷之意요 至善은 則事理當然之極也라
言 明明德 新民을 皆當止於至善之地而不遷이니 蓋必其有以盡夫天理之極이요
而無一毫人欲之私也라 此三者는 大學之綱領也라

 

[明明德] 德: 得也.論語-行道而有得於心.大學-人之所得乎天 虛靈不昧
[新民]自行化他 [止於至善]

 

[氣稟] 性理學=性卽理學. 本然之性:仁義禮智信(五常). 氣質之性:氣의 淸濁
[人欲]私 天理=公

 

知止而后에 有定이니 定而后에 能靜하고 靜而后에 能安하고 安而后에 能慮하고
慮而后에 能得이니 止者는 所當止之地니 卽至善之所在也니 知之면 則志有定向이라
靜은 謂心不妄動이요 安은 謂所處而安이요 慮는 謂處事精詳 이요
得은 謂得其所止라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하니 知所先後면 則近道矣리라

 

明德爲本이요 新民爲末이며 知止爲始요 能得爲終이니 本始는 所先이요 末終은 所後라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는先治其國하고 欲治其國者는 先齊其家하고 欲齊其家者는 先修其身하고
欲修其身者는 先正其心하고欲正其心者는 先誠其意하고 欲誠其意者는 先致其知하니
致知는 在格物하니라 物格而后에 知至하고 知至而后에 意誠하고 意誠而后에 心正하고
心正而后에 身修하고 身修而后에 家齊하고 家齊而后에 國治하고 國治而后에 天下平이니라
自天子로 以至於庶人히 壹是皆以修身爲本이니라 其本이 亂而末治者 否矣며
其所厚者에 薄이요 而其所薄者에 厚는 未之有也니라

 

解說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명덕과 신민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지선을 얻어 그치겠는가?

 

먼저 그칠 바를 알면 識見이 가려지는 바가 없어질 것이다.
이치에 자연히 어두운 바가 없어진 뒤에 나의 뜻에 定함이 있다.
뜻이 정해지면 안으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밖으로는 사물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마음에 움직임이 없는 뒤에 능히 고요할 수 있다.
고요해지면 동요가 나타나지 않아 몸에 처리하는 것이
處地에 가릴 바가 없어진 뒤에 능히 편안할 것이다.


편안하면 日用의 사이에 慫慂하고 閑暇하여 일이 이르고 만물이 온다.
헤아림이 있은 뒤에 능히 慮할 수 있으면 일에 따라 이치를 보고서 極深硏幾할 수 있다.

모두 당연한 법칙에 합당한 뒤에 明德과 新民이 至善이 있는 곳을 모두 얻어 그칠 것이다.
얻는다는 것은 물욕이 발동해서 이문이 생기고 돈이나 얻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터득하여 체험하는 得知를 말한다.

 

그칠줄 알아야 한곳으로 마음이 정해지고, 마음을 일정한 곳에 沒入하면,
자연 고요해져 나아가 편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 사려 깊게 생각할 수 있어서 마침내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체득하게 된다.

 

知止 有定 能靜 能安 能慮 能得(6단계)를 밟는 가운데,
바른 생각이 날 것이고 바른 생각 속에서 모든 이치가 들어 있으므로
사람의 行動規範이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참사람이 되는 방법) 주역의 重山艮은 산이 중첩된 괘상으로 후중히 제자리에
그치는 괘 止 定 靜 安 慮 得:儒家의 觀공부의 구체적인방법론(불가의 禪과 通)

 

발을 대고 앉아서(止) 기기서 몸을 안정시켜서(定) 정신이 고요해지고(靜)
심신이 편안해지면서(安) 그 맑은 가운데에서 올바르고 참된 생각이 나서(慮)
마침내 온 세상의 진리를 깨우치는(得) 것이다.
사물에 이르러(格物) 앎을 깨우치는(致知)방법으로 보았다.

 

즉 물의 근본인 내 자신부터 그칠 줄 알아야 마침내 능득하게 된다
[혹문] 활 쏘는 사람이 과녁에 적중시키기를 원하지만 먼저
그 과녁의 정곡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적중시켜야 할 곳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정곡을 맞힐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쳐야 할 바를 안다면 반드시 그칠 곳을 얻을 수 있기에
이는 서로의 거리가 먼 것이 아니다.
그 사이의 四節(定 靜 安 慮)또한 所以然의 유래를 미루어 말한 것이다

 

공자는 ‘15세에 志學으로부터 70세에 從心에 이르는 그 중간에는
여러 큰 단계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 과정이 큰 것이다.
그러나 知止로부터 能得에 이르기까지 志學(15세 定)으로부터
而立(30세 靜)에 이르고, 而立으로부터 不惑(40세 安)에 이르는 것과 유사하다.

 

物有本末 事有始終 知所先後 則近道矣

格物의 物은 곧 밖으로부터 나에게 온 것이고,
物이 格하여 앎에 이르는 이른바 物格知致는
내 마음과 뜻이 바른가와 정성을 다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身이란 만 가지 일에 있어서 근본이 되고,


物이란 내 몸에 근본해서 알게 되는 끝이니,
만약 자신의 몸을 닦지 아니하면 안으로는 마음과 뜻이 주장하는 바가 없게 되고,
밖으로는 집이나 나라 천하도 말미암을 바가 없게 된다.

 

이렇듯 내가 밖으로 인식하는 대상인 物은 外末에 해당하고
이를 인식하는 주체인 나 자신은 內本에 해당한다.
대개 格은 致의 근본이고 致는 誠의 근본이 되는데

 

몸에 이르러서야 그 근본이 세워지므로 身外无物(몸 밖에 물건이 없음)이라고 말함.
이 절목은 논어’의“本立而生(근본이 세워져야 도가 생긴다)”과 상통하는 글이다.

 

工夫의 先後 次例를 안다면 나아감에 順序가 있기에,
가까운 것을 가벼이 여겨 먼 곳에 힘쓰지 않으며,
아래에 處하여 위를 엿보지 않는다면 道에 들어감에 있어서 멀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일러 도에 다다름이 가깝다고 말한 것이다.

(주자)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아야 學問의 道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
道를 얻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아가는 次例를 알았다면 道에 이를 수 있는 段階에 있으므로
道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黃氏) *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子路가 평소에 잘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충고한 말임.)
자로야 내가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라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자는 알려고 노력할 수 없다.

 

夫唯病病 是以不病’(老子)병을 병으로 알고 있으면 더 이상 병이 아님.

物: 존재하는 어떤 것.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무언가로 인해 존재하며 나 아닌 남과 존재.
존재하는 것보다는 존재하는 관계가 중요함

 

事: 일을 하는 것.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
맺는 관계의 양상(父慈子孝)

事理란 所以當之則(倫理 規範)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법칙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옛 사람들의 學問하는 次例로 明明德하여 新民하려면
天下에서 이를 구하기에 앞서 그 나라를 다스려 天下의 모든 百姓이 보고 느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함.
治國을 하려는 자는 齊家를 하여 百姓들이 그 敎化의 家風에 振作될 수 있는 根本을 마련함.
齊家를 하려는 자는 修身을 하여 한 집안의 食口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根本을 마련함.
修身을 하려는 자는 어찌 한낱 자신의 몸에서 追求하는 데 그쳤겠는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한 몸의 주재를 올바르게 하는데 있음.
正心을 하고자 하는 자는 어찌 한낱 마음에서만 구하였겠는가?
먼저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하여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진실하게 한 데 있다.
誠意를 하고자 하는 자는 어찌 한낱 생각에서만 구했겠는가?
먼저 앎을 지극히 하여 진실과 거짓의 幾微(선악의 미세한 조짐)를 명확히 분석하는데 있다.

 

 

 


앎을 極盡히 한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事物에로 나아가 天下 事物의 理致를 窮究한데 있을 뿐이다.

情 意 志는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意 志는 情이 나온 뒤에 작용한다.
(先後.始終의 관계)“意란 情으로 因緣하여 計較(=發用)를 하는 것이다.

栗谷은 마음이 처음 動하는 것을 情이라 하고,


이 情을 따라서 商量하는 것을 意라고 함.
情은 마음이 처음 발동하는 것이기에 善하지만
意에는 計較와 商量이 있는 까닭에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誠情이라 말하지 않고 誠意라 한다.
志는 確固不動한 意志를 말함.

 


誠과 不誠, 自慊과 自欺는 지극히 작은 데에서 나누어진다.
自謙은 선과 내가 하나이지만, 自欺는 선과 내가 둘로 나뉘어 있음을 말한다.

 

明明德: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新民:齊家 治國 平天下
格物致知는 至善이 있는 곳을 알려고 追求하는 것이며,
意로부터 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至善을 얻어 그 곳에 그치기를 追求하는 것이다.

 

物格 知致는 그칠 바를 앎이며,
意誠 心正 修身 家齊 國治 天下平은 그 그칠 바를 얻은 것이다.

 

明明德天下란 스스로 밝은 德을 밝하고 이를 미루어 百姓을 새롭게 하여
天下의 모든 사람들까지 모두 다 제각기 밝은 德을 밝히는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밝은 德을 밝히면, 각기 그 생각을 誠實하게 가지고,
各各 그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각기 그 몸을 닦고, 各各 그 父母를 孝道로 섬기고,
각기 그 어른을 恭敬하여 天下가 太平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天下의 根本은 한 나라에 있으므로 天下를 평정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나라의 根本은 집안에 있으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집안을 가다듬어야 하며,
집안의 根本은 나의 몸에 있으므로 집안을 가다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한다.

 

한 몸의 主宰는 마음이다. 만에 하나 그 本然의 正道를 얻지 못하면
몸의 主宰가 되는 마음이 없으므로, 비록 몸을 닦으려고 힘써도 不可能한 일이다.

 

 

그러므로 몸을 닦으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곧 意(뜻 또는 생각)이다.

 

 

 

만일 마음에 私慾이 뒤섞여 있어 善을 行하고 惡을 버리는 데에 혹 眞實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마음에 累가 되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힘써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그 뜻을 진실되게 해야 한다.
앎이란 마음의 神明으로서 뭇 理致를 奧妙하게 알고 萬物을 主宰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이같은 앎을 가지고 있지 않는 바 없다.
그러나 혹 안팎으로 훤하게 다 아는 바 없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그 微細한 部分에 眞實과 거짓이 뒤섞이게 되므로,
뜻을 眞實되게 하려고 힘써도 不可能한 일이다.

 

그러므로 뜻을 眞實하게 하려는 者는 반드시 앞서 그 앎을 極盡히 다해야 한다.
致란 “미루어 다함(推致)”을 말한다.

 

예컨대 ‘喪致乎哀’<論語.자장>의 致자와 같다.
이는 미루어 至極함에 다다름을 말한다.
天下의 事物에는 반드시 各各 그 所以然이라는 原初的 理由와
所以當이라는 當爲性의 法則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理致이다.
사람들이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간혹 精粗,隱顯을 남김없이 다 窮究하지 못하면,
理致를 모두 窮究하지 못하는 바 있어 앎에 가린바 있으므로,
비록 앎을 다하고자 힘써도 또한 不可能한 일이다.

 

그러므로 앎을 다하는 道는‘事物 上에 나아가
理致를 觀察하고 事物을 窮究’한 데 있다.
格이란 지극히 하여 ~에 이른다(極至)’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格于文祖’<書經.순전>의 格 자와 같은 뜻으로,
이는 그것을 다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름을 말한다.

 

이는 <大學>의 條目이요 聖賢이 서로 傳受한 바로서 學問의 次例가 至極히 纖細하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堯舜이나 文武와 같이 自身의 밝은 德을 밝히고
이를 온 世上에 펼쳐서 새롭게 하였던 聖人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明明德에 바탕하여 新民하였던 事例를 말 한 것이다.

 

明明德과 新民이 이루어져서 나와 世上이 다 밝아지면 止於至善을 이룬다
知所先後 則近道意: 자신의 밝은 德을 天下에 밝히는 平天下를 이루기 爲해서는
먼저 治國을 해야 하는데 치국을 하려면 正心 誠意 致知 格物이 되어야 한다.

 

物有本末: 天下는 國, 國은 家, 家는 身, 身은 心, 心은 意, 意는 知, 知는 物이 根本이 된다.
事有始終: 天下를 平하는 始初는 治, 治의 始初는 齊, 齊의 始初는 修,
修의 始初는 正, 正의 始初는 誠, 誠의 始初는 致, 致의 始初는 格이 된다.

 

終則有始: 格 致 誠 正의 漸進的 段階를 밟음으로써 內的 過程인 明明德을 마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또 外的 過程인 新民의 修 齊 治 平이 비롯된다.

 

 

格物致知: 格은 窮究다.(事物의 理致를 끝까지 探究)


物은 存在하는 어떤 것.
致란 擴張.
知란 知覺과 識別의 認識能力. 等價的 槪念으로 明德을 밝히는 첫 단추로
꿈과 꿈을 깨는 關門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

 

誠意正心: 段階的인 槪念으로 善과 惡을 區分짓는 關門으로
人間이 되느냐 鬼神이 되느냐의 관문.
눈이 내 몸의 一部이듯 나도 또 日輪의 一部이다.
내가 大地의 一部라는 것은 내 다리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 피는 또 바다의 一部이다.
내 魂은 내가 全人類의 一部라는 것을 알고 있다.

 

(로렌스의 ‘現代人은 사랑할 수 있는가’ -아포카리프스론-)
日輪과 함께 始作하라 日天, 月天마저도 벗으로 삼고 하늘과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는 雄大한 境涯를 여는 것이 明明德을 하여 新民하고 止於至善으로가는 修行인 것이다.

 

人生의 目的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가는 것 自體가 즐겁다’는 絶對的 幸福境涯를 自身의 生命에 굳게 쌓아가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즐겁다. 아무 것도 없어도 즐겁다. 生命 깊숙한 곳에 歡喜가 있다.
未來에 대한 確信이 있다.

 

暴風雨가 칠 때 波濤는 움직여도 大海의 깊은 곳은 흔들리지 않듯이,
또 豪雨가 내리는 날에도 먹구름을 뚫고 올라간 저 높은 곳에는 太陽이 빛나고 있듯이
‘苦樂 함께 즐기면서’ 한걸음 한걸음 價値를 낳고, 境涯를 열어간다.
그것이 諸法實相의 人生이다

 

格:窮究.極至(지극히 하여 ~에 이른다)
物:存在.萬物의 理致.具體的對象
* 나의 지식을 미루어 지극히 하여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격물)

 

致:擴張.極大化.豁然貫通.推致(미루어 다함)
知:知覺,識別의 認識能力(先天的賦與).神明.
*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극처가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하는 것.

 

誠:誠實.眞實
意:마음이 발한 것
* 마음이 발하는 바를 성실히 하여 반드시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속임이 없고자 하는 것.

 

正:바른 것
心:몸의 主人
* 몸의 주재자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善과 惡을 구분짓는 관문으로 人間이 되느냐 鬼神이 되느냐의 문제로 段階的인 槪念이다.

 

情:마음이 처음 動하는 것(善)
意:情을 따라서 商量하는 것(善과 惡이 共存)(誠情아니고 誠意다.)
志:確固不動한 意志. 마음이 가는 바의 곳.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知至:心理的 측면에 중점 知止:事物의 측면에 중점
至:이미 그곳에 이르렀다는 功效處
致:미루어 나가야만 바야흐로 그처럼 할 수 있다는 工夫處 知와 意: 서로 聯關性
모든 節에서 이로써 미루어 나가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은 앎이라는 하나의 大單位로서 곧 平天下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意誠:一時一事 心正:全體渾然 齊家治國平天下:그들의 모든 敎化와 對處하는 일까지를 兼한다.

 

옛사람들의 工夫方法: 事物의 理致를 窮究하되 남김없이 極盡히 한 後에야
內面의 앎이 至極하여 極致에 이르고,
앎이 至極한 後에야 道理가 밝혀져 어려움 없이
이를 實行하여 그 생각을 眞實하게 할 수 있고,

 

그 생각이 眞實한 後에야 한 몸에 主在가 있어 모두 眞實해 지므로
그 어떤 事物에도 動搖됨이 없이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야 마음에 主在되는 바가 있어
어떠한 事物에도 얽매이지 않으므로 몸이 닦여지게 되고,
몸이 닦여진 後에야 한 집안의 法이 될 수 있으니,
이를 계기로 집안이 가다듬어지게 된다.

 

집안이 가다듬어진 다음에 한 나라에 感化를 불어넣을 수 있으니,
이를 계기로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 수 없다.
나라가 다스려진 다음에는 이 道理를 가지고 그 밖의 다른 나라에까지
더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제각기 밝은 德을 밝힐 수 있으니,
이를 계기로 天下가 다스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할 바와 뒤에 해야 할 바를 아는 것이 이와 같았다.

 

格物의 格:窮 ,
物格의 格:至 格物이란 事物의 理致를 探究 摸索하는 工夫의 立場에서 말한 것이기에,
窮理,窮究 따위의 硏究精神을 表現하는 窮자의 意味가 浮刻되었고,


物格은 格物에 의해서 이미 얻어진 功效處로서,
事物을 對함에 있어 事物의 理致가 自身의 認識에 스스로 와 닿는 밝음을 뜻하기에,
工夫와 努力의 次元을 떠나서 그것이 스스로 이르러 온다는 “至”자의 뜻을 지니게 된 것이다.

 

物格과 知至의 關係: 物格은 物理의 極處가 이르러 온다는 것이다.
만일 나의 知識이 極處에 이르렀다고 말하면 그것은 知至이다.
實際로 物格과 知至는 等價的 槪念으로 보면 한 가지이지만
物理라는 側面으로 말하면 物格이요,
내 마음의 認識 側面에서 말하면 知至다.

 


이는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注意 깊게 살펴보아야 할 點은 事物의 理致는
人間의 認識 與否와 關係없이 原來부터 至極한 곳에 存在한다는 事實이다.
例를들면 어두운 방안에 冊은 시렁위에 있고 옷은 횃대 위에 있고 상자는 壁 아래에 있는데,
어둠으로 因하여 物件을 볼 수 없기에 冊이나 옷 따위가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으나,
등불을 가져다 비춰보면 冊가지 等이 있는 곳을 分明히 볼 수 있으며,
그처럼 밝게 본 뒤에 冊 옷 等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物理는 原來 極處에 있기에, 格物 以後에 極處에 이른 것이 아니요,
또한 스스로 알고서 極處에 이른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知識에 밝고 어둠이 있기에 理가 이르고 이르지 않는 差異가 생기는 것이다.

 

知至와 意誠의 관계: 凡聖이 나누어지는 界分이기에 이 關門을 通過하지 않으면
設令 조그마한 線이 있을지라도,
이는 마치 검은 物體 속에 자그마한 흰 點이 박혀 있는 것처럼 線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 關門을 通過하면 비록 작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흰 物體 속에 미세한 검은 점이 있는 것처럼 큰 問題가 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意誠 以後에 비로소 더러운 찌꺼기와 怜悧心(영리심)을
말끔히 씻어내어 義理로 充滿하게 할 수 있다.

 

意: 發動하는 곳
心: 本體(動靜포함)
身: 心의 對稱 뜻이 이미 眞實하여 마음이 將次 바르게 될 즈음에
恐懼와 哀樂의 感情에 이끌리면 또한 邪惡하게 되므로 이를 心正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며,
몸을 制裁하지 않고 外部의 일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마음과 行實上에 差異點을
가져오게 되므로 身修라 말할 수 없다.



物格이란 事物(사물)의 理致(이치) 極處(극처)에까지 나아가 조금도 남음이 없음을 말함.
事物上 理致의 極致에까지 나아가 남음이 없으면
나의 앎 또한 그 造詣(조예)에 따라서 極盡하지 않는 바가 없다.


앎이 極盡하면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 또한 天理(천리)와 하나가 되어 스스로 속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마음의 本體(본체)가 바깥 事物(사물)에
動搖(동요)되지 않음으로서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몸의 처한바 偏僻(편벽)된 곳에 빠지지 않음으로서
몸이 닦여지지 않는 바 없을 것이다.

 

몸이 닦여지면 이를 미루어서, 天下 國家에 措處(조처)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러한 道(도)를 度外視(도외시)하고서 智謀(지모)와 功利(공리)라는
枝葉的(지엽적)인 데에서 求하려 하는가? 明明德을 新民의 對稱(대칭)으로 말했는데,
이는 오로지 스스로 밝혀야 한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平天下에 對해서도 明明德으로 이를 말했다.
天下가 크다고 하지만 내 마음의 本體에 모두 갖추어져 있고,
事物이 많다고 하지만 내 마음의 作用으로 모두 貫通(관통)되지 않는 게 없다.
이 때문에 반드시 이를 分析(분석)하여 그 精密(정밀)함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어지러움이 없는 뒤에야,
다시 이를 綜合(종합)하여 그 큰 것까지 다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할 수 있다.

 

玉溪盧氏 曰 大學의 體用은 둘이 아니다.
내 마음의 本體가 곧 明德의 虛로서 衆理를 갖추고 있으며,
내 마음의 作用이 곧 明德의 靈으로서 萬事에 應할 수 있다.

 

이를 잘 分析하여 그 精密함을 다하되 어지럽지 않으면
내 마음의 作用이 貫通되지 않는 바가 없으며,
이를 잘 綜合하여 그 큼을 다하되 남음이 없으면
내 마음의 本體가 갖추어지지 않은 바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分析해 보지 않고 문득 이를 綜合하여 보고자 한다면
虛空.恍惚(황홀)한 病弊(병폐)를 가지게 되며,
한갓 分析을 하고 이를 綜合해 볼 줄 알지 못하면
支離(지리).破碎(파쇄)한 病弊를 가지게 된다.

 

반드시 이를 分析하여 그 精密(정밀)함을 다한 后에 이를 合하여 그 큼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大山先生 曰
格物:내 自身이 事物의 窮極處까지 當到하여 그 事物에 內在된 理致를 끝까지 硏究해내는 것.
物格:이미 事物의 窮極的 理致를 通한 것으로, 모든 物件에 들어 있는 '
極盡한 理致가 내게 이르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窮極的인 事物의 理致가 내게 到達하여 物格이 이루어지면
事物의 理致를 完全히 알게 되는 것인데,
이는 곧 앎이 나에게 이르는 것이므로 知至다.

知至는 내 마음속에 알려고 하는 바를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앎이 다하면 事物에 內在된 理致(本末終始)를 모두 깨달아 모르는 것을 다 아니까,

 


그때는 그 앎을 잘 써보려고 뜻이 誠實해집니다.
마음이 發動한 것이 뜻인데 意誠,
즉 發動된 뜻이 誠實해지니까 마음도 그에 따라서 바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心正입니다.

 

이렇게 自身의 마음이 바로 서면 自然 몸이 닦여서 身修,
몸이 닦이면 그 집안 食口들이 본받아 規範(규범)과 法度(법도)를
갖추게 되어서 家內(가내)가 다 가지런해지므로 家齊,

 

自身을 비롯한 父母兄弟 等 모든 食口들이 他人의 模範이 되므로
가까이는 周邊 이웃으로부터 한 나라, 더 나아가서는 온 천하에까지
그 가르침을 펼쳐서 國治와 天下平이 됨.

 

八條目을 說明한 앞글은
下學의 過程(平天下-治國-齊家-修身-正心 誠意-致知-格物)에 對한 說明이고,
여기서 事物의 理致를 깨달아 그 功效(공효)가 미치는
上達의 過程(物格-知至-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에 對한 說明이다.

 

모든 事物에 本末先後가 있는 理致에 着眼하여 앞의 節目에는
“先”을 넣어 下學의 길을 提示(제시)하고,
뒤의 節目(절목)에는“后”를 두어 上達의 길을 說明하고 있는데,
앞의 節目이 逆으로 거슬러
根本을 回復하는 過程인 下學의 工夫에 該當(해당)한다면
여기 節目(절목)은 順으로 根本을 미루어 나아가는 上達의 功效에 該當하는 것이다.

 

修身以上(修身 正心 誠意 致知 格物)은 밝은 德을 밝히는 일이므로 內的이고
根本的인 것이 되고,
齊家 以下(齊家 治國 平天下)는 新民의 일로서 外的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物格과 知至는 그칠 줄을 아는 것이고,
意誠以下(意誠 心正 身修 家齊 國治 天下平)는 그칠 바를 안 다음에 그치는 順序다.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 厚未之有也



몸이란 天下 나라 집안의 對稱으로 말하면 몸은 根本이요,
天下와 나라와 집안은 枝葉的인 것이며,
집안을 나라와 天下의 對稱으로 말하면
그 理致는 하나이지만 厚薄(후박)의 分手 또한 差等이 없을 수 없다.

 

이 때문에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으로 몸을 닦지 않으면
根本이 어지럽게 됨으로써 枝葉的인 것이 다스려질 수 없으며,
제 父母를 사랑하지 않거나 어른을 恭敬하지 않음은 두텁게 해야 할 곳을 얇게 하여,
他人의 父母와 어른에게 미쳐갈 수 없다.

 

孟子의 말에 “두텁게 할 곳을 얇게 하면, 어느 곳에서든 얇게 하지 않을 바 없다
<孟子 ‘盡心 下’>”라는 말 또한 이에 根本하여 말한 것이다.

 

治國 平天下는 天子와 諸侯의 일로서 卿大夫以下의 사람에게는 關聯된바 없는데
‘明明德於天下’라고 말한 것은 分手를 벗어난 行爲니 어떻게 自身을 위한(爲己)學問이라 하겠는가?
하늘의 明德은 태어나면서부터 다 같이 얻은 것이며, 나만이 사사로이 얻은 것이 아니다.


이에 君子의 마음은 막힘이 없고 드넓고 크게 公正하여,
天下의 어느 사람을 보든지 내 마음에 宜當 사랑해야 할 對象이라 생각하지 않는 바 없고,
무슨 일을 보든지 내 職分上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天下 國家의 다스림을 自身의 當然한 일로 생각하여,
미리 그 根本을 바로 잡고 本源을 맑게 해야 한다.

 

後世에 이르러 가르침과 배움이 밝지 못하여 나라의 임금이요
父母인 君主의 생각에 이에 미치지 못하여 마냥 目前의 일에
苟且스럽게 急急하여 天下의 太平聖代를 찾아보기 어렵고
混亂의 時代가 이어져 나라를 잃어버리고 집을 망치는 君主가 되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天下의 모든 일을 自身이 해야 할 마땅한 일로 생각하여
이를 行하여야 爲己의 學問이 되지만 世上의 名譽를 구하고자 이를 行한다면,
設令 허벅지 살을 베어 父母를 받드는 孝誠.侍墓(시묘)살이를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爲人(위인)에 該當하는 行爲들이다.

 

배우는 자는 날마다 스스로를 反省하면 善과 利의 사이를 잘 살피게 되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바 없을 것이다.
爲己와 爲人의 差異點은 예컨대 讀書는 자신이 마땅히 이와 같이
읽어야 할 일이라 생각하여 이와 같이 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남이 알아주기를 願한다면 이는 作爲가 있는 것이다.
世上 사람들이 讀書를 하면서 곧잘 詩文을 지으려고 생각하는 것
또한 크나큰 爲人이라 하겠다.

 

朱子 曰 허벅지 살을 베어 父母에게 드리고 侍墓를 치르는 것은 하나의
그 어버이의 病患을 안타깝게 여기는 孝誠의 마음이며,
하나는 그 어버이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自身의 孝誠스러운 마음을 다하는데 있다.
만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서 이와 같이 한다면 이는 곧 남의 耳目과 名譽를 위한 일이다.

格物 致知 誠意 正心은 모두 修身을 하기 위함이요.
齊家 治國 平天下는 모두 이 修身에서 비롯됨을 말하고 있다.
明明德은 根本이며 修身은 그 根本을 바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嚴密히 말하면 明明德이지만 이를 省略하면 修身이다.
庶民에게는 나라와 天下를 다스려야 할 責任이 없다지만
諸각기 집안을 所有하고 있기에 이를 말한 것이다.
모든 事物에는 根本과 끝이 있는데 修身이란 바로 그 根本에 該當된다.

 

天子로부터 微賤한 庶民에 이르기까지 天下와 나라와 집안을 다스려야 할
責任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삼가 몸을 닦아서
나라와 집안을 다스릴 수 있는 根本을 마련해야 한다.

 

“두터이 해야 할 곳을 얇게 한다”라는 것은
根本的으로 몸을 닦지 않고서 집안을 가다듬고자 하는 것이기에,
나라가 다스려질 수 없는 病弊가 發生되는 실마리라 하겠다.

 

따라서 두터이 해야 할 家庭에 먼저 잘못을 犯하면서
어떻게 보다 큰 나라와 天下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는
疑問을 提起하여 根本을 어지럽힐 수 없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天下에 모든 사람은 修身을 根本으로 삼아야 한다.
몸은 根本이요 國家와 天下는 枝葉이다.
格物致知 誠意正心으로 몸을 닦지 않으면
그 根本이 먼저 어지럽혀지므로 그 枝葉이 다스려질 수 없다.

 

몸을 닦지 않으면 집안에서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지 못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지 못함으로써 두터이 하여야 할 곳을 또한 얇게 한 셈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나라와 天下는 집안에 비해 얇게 해야 할 곳인데,
어떻게 이에 두터이 하여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大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먼저 德을 밝혀 몸을 닦지 않을 수 없다.
論語 “躬自厚而薄責於人”自身을 스스로 두텁게(심하게) 꾸짖고,
他人은 얇게(가볍게) 꾸짖는다고 하여

 

“두터이 할 바란” 그 몸을 스스로 꾸짖는다는 明白한 證據임에도
왜 何必이면 몸을 버려두고 이를 집안에 歸屬시켜 말했을까?
始終 本末 厚薄은 모두 本末의 立場에서 말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 部分에 新民에 該當하는 家를 끼워 넣어
明德과 新民의 限界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修身을 들어 齊家 治國 平天下를 둔다는 것이다.
正心以上(格物 致知 誠意 正心)은 修身을 根本으로 삼았으니까
이를 못하고서는 修身이 되지 못하고
格物致知 誠意正心을 하여야 비로소 修身이 이루어진다.

 


齊家以下(齊家 治國 平天下)는
格物 致知 誠意 正心을 해서 이루어진 修身을 들어가지고,
齊家 治國 平天下를 한다는 것이다.

 

修身을 바탕하여 어느 일이든지 能히 責務를 다하는 適材適所의 人物이 된다는 얘기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自己 父母를 恭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의 어른들을 恭敬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안에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근본 법도다.

 

그 근본이 되는 부모와 형제 그리고 처자부터 厚하게 해나가게 마련인데
정작 厚하게 對해야 할 家族에게 薄하게 하면서
家族에 比해서는 薄하게 해도 되는 남들에게 厚하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修身이 그 根本이 된다는 말이다.
新民은 <孟子>에서는 先覺者가 後覺者를 깨우친다는 말과 通한다.

 

 

<中庸>에 成己 成物
<論語>에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佛敎>自行化他.
<基督敎>傳道.
<儒敎>德治主義.

至善은
<中庸>의 中和
<周易>의 中正
<陽明先生>의 民彝物則
<朱子>는 事理當然의 極 止에 對해서는
<朱子>必止於是而不遷之意
<陽明>是非曲折과 輕重厚薄에 따른 隨時變易的止
<孟子>萬物皆備於我矣

 


格物:사물의 이치를 궁구 物格:격물에 의해 사물의 이치가 자신의 인식에 스스로 와 닿은 밝음
致知:지각 식별의 인식능력을 미루어 나아가 극처에 이름
知至:지식이 그곳에 이르렀다는 심리적인 측면
知止:지식이 그곳에 이르러 그쳐있다는 사물의 측면
意誠:마음이 발동한 뜻이 성실하여 만족하고 속임이 없고자 함
心正:몸의 주인인 마음이 渾然一體가 됨(공포와 애락의 감정에 이끌리면 사악해 짐)

 

下學의 과정:平天下-治國-齊家-修身-正心-誠意-致知-格物(先)
上達의 과정:物格-知至-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后)
內的:밝은 덕을 밝히는 일(修身 正心 誠意 致知 格物)
外的:신민의 일(齊家 治國 平天下)
爲己:독서는 자신이 마땅히 읽어야 할 일
爲人:남이 알아 주기를 원하여 곧잘 시문을 지으려는 생각

 

始終:平의 시초는 治,治-齊.齊-修,修-正,正-誠,誠-致,致-格
本末:天下의 본은 國,
國-家,家-身,身-心,心-意,意-知,知-物

厚薄:
明明德:理性을 찾는 工夫로 自己完成
新民:先覺者가 後覺者를 깨우침.
成物(己). 己欲立而立人. 自行化他傳道. 德治主義.
親民. 親而新
止於至善:中和. 中正. 民彝物則. 事理當然의 極.
<至善> 必止於是而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