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心銘 원문과 현토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하리라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하나니
欲得現前이어든 莫存順逆)하라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니
不識玄旨하면 徒勞念靜이로다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이어늘
良有取捨하야 所以不如라
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須臾返照하면 勝脚前空이라
前空前變은 皆由妄見이니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니
二見不住하야 愼莫追心하라
纔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
二由一有니 一亦莫守하라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니라
無咎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
能隨境滅하고 境逐能沈하야
境由能境이 能由能境이니
欲知兩段인댄 元是一空이라
一空同兩하야 齊含萬象하야
不見精醜어니 寧有偏黨가
大道體寬하야 無易無難이어늘
小見狐疑하야 轉急轉遲로다.
執之失度라 必入邪路요
放之自然이니 體無去住라
任性合道하야 逍遙絶惱하고
繫念乖眞하야 昏沈不好니라
不好勞神커든 何用疎親가
欲趣一乘이어든 勿惡六塵하라
六塵不惡하면 還同正覺이라
智者無爲어늘 愚人自縛이로다
法無異法이어늘 妄自愛着하야
將心用心하니 豈非大錯가
迷生寂亂이요 悟無好惡어니
一切二邊은 良由斟酌이로다
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眼若不睡하면 諸夢自除요
心若不異하면 萬法一如니라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然하야
萬法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
止動無動이라 動止無止니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究竟窮極하야 不存軌則이요
契心平等해야 所作俱息이로다
狐意淨盡하면 正信調直이라
一切不留하야 無可記憶이로다
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이라
非思量處라 識情難測이로다.
眞如法界엔 無他無自라
要急相應하면 唯言不二로다
不二皆同하야 無不包容하니
十方智者가 皆入此宗이라
宗非促延이니 一念萬年이요
無在不在)하야 十方目前이로다
極小同大하야 忘絶境界하고
極大同小하야 不見邊表라
有卽是無요 無卽是有니
若不如此인댄 不必須守니라
一卽一切요 一切卽一이니
但能如是하면 何慮不畢가
信心不二요 不二信心이니
言語道斷하야 非去來今이로다.
信心銘 번역과 해설
1.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하고 취사선택함을 꺼릴 뿐이라,
지극한 도(至道)는 무상대도(無上大道)다. 간택(揀擇)은 법을 분별하여 어떤 법은 취하고 어떤 법은 버리어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예컨대,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취하거나 또는 번뇌와 보리를 분별하여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취하거나 또는 중생과 부처를 분별하여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취하는 것 등이니 이것은 평등일여(平等一如)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모르기 때문이다.
2.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하리라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면, 툭 트여 명백하리라.
형상、소리、냄새、맛、감촉、법(受.想.行)의 육진경계에 대하여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아서, 움직이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면 툭 트여 마음에 걸림이 없어 자유자재하며, 명백하게 대도(大道)가 나타난다.
이 사구(四句)가 곧 신심명의 결론이다. 이하 나머지는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보충하여 해설하는 것뿐이다.
3.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하나니
털끝만치만 어긋나도, 하늘과 땅만큼 벌어지나니,
털끝만큼이라도 싫어함도 없고 좋아함도 없어야 비로소 대도가 나타나는 것이라, 좋고 싫음이 없는 경지는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랜 세월 반야지혜를 갈고 닦으며, 육진경계에서 좋고 싫음이 없는 평정심을 단련해야만 비로소 움직임이 없는 부동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欲得現前이어든 莫存順逆하라
성도(聖道)가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면, 순(順)、역(逆)을 두지 말라.
순(順)경계는 마음에 맞아 좋아하는 경계이고, 역(逆)경계는 마음에 맞지 않아 싫어하는 경계이다. 증애(憎愛)의 다른 표현이다. 예를 들어 듣기 좋은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말、칭찬、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과 소문、찬탄하고 공대하는 말 등은 순경계요, 욕、폭력적이고 거친 말、냉정한 말、꾸짖는 말、비방은 역경계다. 이 모든 말들에 대하여 좋아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으면 순역이 없는 것이다.
5.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니
뜻을 거스르고 순종함이 서로 다투면,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나니,
위순(違順)도 순역(順逆)과 같은 뜻이다. 남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면 화를 내고 다투고, 남이 자신의 뜻에 맞으면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음의 병을 초래하여 결국은 괴로움이 되고 만다.
6. 不識玄旨하면 徒勞念靜이로다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헛되이 생각을 가라앉혀 고요히 하는구나.
현묘한 뜻(玄旨)은 양변(兩邊)의 분별이 없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며 만법이 평등일여(平等一如)한 도리이다.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참선으로 고요한 무심(無心)의 경지만 얻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헛공부라는 것이다.
7.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이어늘
지극한 도는 원만하기가 큰 허공과 같아,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만하다는 것은 치우침이 없고 모자람과 남음이 없는 것이다. 치우침이란 양변을 나누어 일변(一邊)을 취하고 다른 일변을 버리는 것이다. 모자람이란 무언가 보탤 것이 있는 것이요, 남음이란 무언가 덜어낼 것이 있는 것이다.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늘어남도 없고(無增), 남음이 없기 때문에 줄어듬도 없다(無減).
8. 良有取捨하야 所以不如라
취하고 버림이 있기 때문에, 여여하지 못하다.
여(如)란 ‘마음이 항상 그대로여서 변함이 없는 것,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취함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변하고 요동친다. 버림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변하고 요동친다.
9. 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세간의 인연을 쫒지 말고, 공(空)한 자리에도 머물지 말라.
유연(有緣)은 유위(有爲)의 세간법이고, 공인(空忍)은 출세간의 지혜이다. 세간법에도 머물지 않고 출세간법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를 뜻한다. 또한 유를 버리고 공을 취하거나, 공을 버리고 유를 취하는 것은 모두 양변을 나누어 분별하고 취사심(取捨心)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 마음의 병(病)이다.
10.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일종(一種)을 평등하게 마음에 품으면, 사라져서 스스로 다하리라.
일종(一種)은 일법계(一法界)、진여(眞如)、법성(法性)、중도(中道)의 다른 표현이다. 법계가 평등하여 한 모양(法界一相)이므로 일종이라고 표현했다. 이 진여법성을 항상 마음에 품어 움직이지 않으면 허망한 견해(妄見)가 사라라지고 번뇌망상이 다한다는 말이다. 허망함이 사라지면 참됨이 나타나니 진여묘용(眞如妙用)이 현전(現前)하여 불가사의한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다.
11. 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참선할 때 망상을 그쳐서 고요하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망상이 더 크게 일어나고 마음이 요동친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나의 대상에 묶되, 망상을 싫어하는 마음도 버리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버려야만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현상이니 여기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저 다시 본래의 명상주제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백번 천번 만번 나가면 다시 거두어들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12.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오직 양변에 정체된다면, 어찌 하나를 알겠는가?
항상 머무름이 없는 도리(無住)를 명심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고요함에도 머물지 말고, 움직임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쌍조(雙照)의 방편이니 고요함을 볼 때는 동시에 움직임을 통찰하고, 움직임을 볼 때는 동시에 고요함을 통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관(中道觀)이다.
마음은 마치 시계추와 같아서 좌측 끝으로 가고 나면 반드시 다시 우측의 반대편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다. 그래서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우측으로 가고 나면 또 다시 반대편인 좌측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안정을 못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좌측으로 가려고 할 때 즉각 우측을 통찰한다면 마음이 가운데 머물러 움직이지 않게 된다. 마음이 우측으로 가려고 할 때 즉각 좌측을 통찰한다면 마음이 가운데 머물러 움직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일여(一如)의 마음이다.
13.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하나를 통달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功)을 잃으리라.
양극단은 둘이지만 이 중도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일종이라 했다. 이 중도인 하나를 통달하지 않으면 양극단(양변)의 공덕을 모두 잃는다. 반대로 이 하나를 통달하면 양변의 공덕을 모두 얻는다.
14. 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유(有)를 버리면 오히려 유에 빠지고, 공(空)을 쫓으면 오히려 공의 뜻을 등지느니라.
시계추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유(有)와 공(空)은 양극단 즉 양변이다. 이것은 시계추의 좌측 끝단、우측 끝단과 같다. 유를 버리는 것(遣有)은 좌측 끝단(유)를 버리고 우측끝단(공)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러면 우측끝단에 이르러 다시 좌측 끝단의 유(有)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유에 빠진다(沒有)고 말했다.
공을 쫓는 것(從空)은 역시 우측 끝단으로 가려는 것과 같다. 그러면 우측끝단에 이르러 다시 좌측끝단의 유(有)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이것은 공(空)을 등지고 배반하는 것이 된다.
이와 달리 유(有. 생멸하는 현상계)를 볼 때 즉각 공(空. 불생불멸의 본체계)를 통찰하면 유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공을 볼 때 즉각 유를 통찰하면 공을 배반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중도관이다.
15.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말 많고 생각 많으면, 갈수록 도(道)와 상응하지 못하니,
중도실상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니 말길이 끊어졌고 마음의 행이 소멸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 많을수록 실상과 멀어지고, 생각이 많을수록 실상과 멀어진다. 말도 생각도 모두 하나인 실상을 쪼개서 양변으로 나누어 분별하고 취사선택하여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말을 끊고 생각도 끊으며 또한 이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분별하거나 집착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 자리에 집착하여 머무르려고 하면 다시 막히게 된다. 마치 바람은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허공에 두루 일어나는 것과 같다.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은 반야지혜가 밝게 빛나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체지(一切智)라고 말하는 것이다.
17.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밖으로 비춤을 따르면 근본을 잃나니,
뜻(旨)은 지혜(智慧)다. 근(根)과 종(宗)은 같은 “근본”의 뜻이며 이것은 곧 중도、진여、법성이다. 근본으로 돌아간다(歸根)는 것은 안으로 비추는 반조(返照)다. 비춤(照)은 바깥으로 비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마음이 밖의 육진경계를 비추어 반연(攀緣)하는 것이다.
18. 須臾返照하면 勝脚前空이라
잠깐이라도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앞의 공(空)보다 더 뛰어나니라.
수유(須臾)는 한번 숨쉬는 시간의 10배정도 되는 짧은 시간이다. 반조(返照)는 밖의 육진경계를 보지 않고 내면의 마음을 비추어보는 것이다. 반조공부가 공(空)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공을 관찰할 때는 공에 머물거나 집착할 염려가 있지만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보면 일체 말과 생각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19. 前空前變은 皆由妄見이니
앞의 공(空)이 바뀌고 달라지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견해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대반야경에서 십팔공(十八空)을 설하셨지만 이것은 18가지의 허망한 견해를 깨뜨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 것이지 18가지의 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참된 공은 말과 생각과 온갖 견해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20.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니
참됨을 구할 필요 없으니, 오직 허망한 견해만 쉬어라.
진여자성을 구하는 것도 역시 일변(一邊)에 떨어지는 것이니 참이 있으면 거짓도 있는 것이라 다시 참과 거짓의 양변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말을 쉬고 생각을 쉬고 허망한 견해를 쉬어버리면 참도 없고 거짓도 없는 본래 마음 진여자성 그대로다. 본래 아무 일이 없다. 비유하자면 본래부터 있는 태양이 드러나려면 억지로 태양을 찾을 것이 아니라 구름만 걷히면 되는 것이다.
21. 二見不住하야 愼莫追心하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마음을 따라가 찾지 말라.
두 견해는 양극단(양변)의 견해다. 마음을 따라가 찾지 말라는 것은 이미 양극단의 마음을 일으켜 놓고 나서 이 허망한 거짓마음에서 진여자성을 찾는 것이다. 양극단의 견해로 분별하고 차별심을 일으켜 취사선택하고 이것은 참되다, 저것은 거짓이다 이렇게 말하고 남과 다투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먹구름이 시커멓게 낀 하늘에서 태양을 찾는 것과 같다.
양극단의 견해를 모두 놓아버려야 마음이 중도에 계합하게 된다. 마치 먹구름이 걷히면 밝은 태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22. 纔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
겨우 조금만 시비를 일으켜도, 어지러워져 본심을 잃느니라.
조금만 시비심(是非心)을 일으켜도 본심을 잃으니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23. 二由一有니 一亦莫守하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역시 지키지 말라.
법성(法性)은 둘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서, 양변의 둘을 버리고 하나를 취하려고 하는 것은 중도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둘(二)과 하나(一)도 역시 양변이며, 버림과 취함이 있는 것은 중도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면 하나도 아니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나요, 남자와 여자는 둘이다. 남녀를 분별하여 나눔으로서 둘도 있고 하나도 있다. 만약 처음부터 분별하지 않았다면 둘이라는 생각도 없고 하나라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곧 둘을 인정하는 것이니 끝내 중도를 얻지 못한 것이다.
24.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니라
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느니라.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양변의 분별이 벌어지고 다툼이 생겨난다. 양변의 둘도 버리고 하나에도 머무르지 않으면 비로소 마음이 툭 트여 만법이 있는 그대로 참된 진여자성일뿐이다. 이렇게 되면 만법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아 자유자재하게 만법을 쓰게 된다.
25. 無咎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음이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느니라.
허물이 없다는 것은 걸림이 없는 것(無礙)이니 허공처럼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어 자유자재하고 법을 보지 않으니 법이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도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마음의 대상도 있는 것이라서 이것도 역시 양변에 떨어져서 중도실상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상에서는 마음도 없고 대상도 없는 것이다.
26. 能隨境滅하고 境逐能沈하야
마음은 대상을 따라 멸하고, 대상은 마음을 쫓아 잠기나니,
능(能)은 인식주관인 마음을 말하고, 경(境)은 인식객관인 대상을 말한다. 대상이 소멸하면 마음도 따라 소멸하고, 마음이 그치면 대상도 사라진다. 능(能)과 경(境), 마음과 대상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짚단 두 개를 기대어 세워놓으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며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도 무너지는 것과 같다.
27. 境由能境이 能由能境이니
대상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대상이요, 마음은 대상으로 말미암아 마음이라.
이것도 역시 같은 뜻이다. 능과 경, 마음과 대상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
28. 欲知兩段인댄 元是一空이라
이 양단을 알고자 하면, 원래 이것이 하나의 공(空)이니라.
양변의 진실은 원래 하나의 공(空)이다. 주관과 객관, 마음과 대상도 역시 하나의 공일뿐이다. 분별하기 전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으니 평등하고 화합하고 다툼이 없다. 그러나 분별하면 공에서 양변의 둘로 갈라진다. 둘로 갈라졌기 때문에 양변의 차별과 대립과 투쟁이 벌어진다. 일체 양변이 갈라지기 전의 본래 모습 이것이 공인데 이것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일법계대총상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體)라고 말한다.
공은 양변의 어느 한쪽도 아니기 때문에 양변을 모두 부정한다고 하여 이것을 쌍차(雙遮)라고 말한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9. 一空同兩하야 齊含萬象하야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고,
공(空)은 양변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본래 모습을 억지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양변이 나누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사실은 양변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양단과 같다고 말했으며 삼라만상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대총상(大總相)이라서 일체법을 포괄한 것이다. 사실 공(空)은 하나도 아니고 공도 아니니 일체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설명하려니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공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공(空)이라는 말을 듣고 그 이름에 집착하여 일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것은 단멸(斷滅)의 그릇된 견해이니,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역시 하나의 이름이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공도 아니고 중도도 아니다.
공은 양변 전체와 같고 삼라만상을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긍정하는 것이며 이것을 비추어 보는 것을 쌍조(雙照)라고 말한다. 이것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공은 양변의 어느 한쪽도 아니지만 동시에 양변 전체와 같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함과 동시에 긍정한다고 하여 쌍차쌍조(雙遮雙照) 또는 차조동시(遮照同時)라고 말한다.
30. 不見精醜어니 寧有偏黨가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늘,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공을 체득한 사람은 공이 양단과 같고 삼라만상을 포함한다고 하여 다시 양변의 차별에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차별 가운데 평등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세밀하고 거친 양변의 차별에 떨어지지 않고(일변에 치우치지 않고) 평등한 본성을 본다. 세밀함 가운데 거침이 있는 것을 통찰하고, 거침 가운데 세밀함이 있는 것을 통찰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본질이 오직 하나의 공(空)임을 항상 꿰뚫어 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31. 大道體寬하야 無易無難이어늘
큰 도는 바탕이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능엄경과 원각경에서 참마음.원각(眞心.圓覺)에서 허공이 생겨났다고 설했으니(無邊虛空覺所顯發), 무변허공도 참마음에 비하면 적은 것이다. 대도(大道) 자체에는 어려움과 쉬움이 없으나, 어려움과 쉬움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진여자성에 무량공덕과 일체지가 이미 원만하게 다 갖추어져 있어서 새로 닦아 얻는 것이 아니니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 불성을 덮고 있는 번뇌가 또한 한량없이 많으니 이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32. 小見狐疑하야 轉急轉遲로다.
좁은 견해로 여우같이 의심하여, 서둘수록 오히려 늦어지는구나.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을 의심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속의 불성에 일체공덕이 원만하게 다 갖추어져 있다는 도리를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다. 조급하게 빨리 결과를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본심과 멀어져서 갈 길이 늦어지는 결과가 된다.
33. 執之失度라 必入邪路요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갈 것이요,
중생들의 병폐는 공(空)을 들으면 공에 집착하고, 불성을 들으면 불성에 집착하며, 중도를 들으면 중도에 집착한다. 이름(名)과 상(相)에 집착하여 분별망상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본성을 잃고 삿된 길로 접어들게 된다.
34. 放之自然이니 體無去住라
놓아버리면 자연이니, 본체는 가고 오고 머무름이 없느니라.
본래 다 갖추어져 있으니 분별망상과 집착만 놓아버리면 자연히 불성이 나타나는 것이고 이 불성은 허공과 같아서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르는 것도 없다. 물론 분별과 집착을 놓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동안 닦아서 지혜를 키우고 단련하여 번뇌를 녹여없애야 한다. 번뇌 자체는 공한 것이지만 번뇌가 공하다고 관찰하더라도 오랫동안 습관이 된 뿌리깊은 집착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35. 任性合道하야 逍遙絶惱하고
성품에 맡기면 도에 계합하여, 자유로이 노닐면 번뇌를 끊고,
분별과 집착을 놓아버리고 취사선택심을 버리고 자연의 성품에 맡기면 저절로 도에 계합한다. 그리하여 일없이 한가하게 인연따라 자유로이 노닐면 번뇌가 자연히 점차 끊어진다.
36. 繫念乖眞하야 昏沈不好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을 어기며, 혼침함도 좋지 않느니라.
계념(繫念)은 생각에 얽매여서 마음이 들뜨고 산란한 것이다. 들뜸과 혼침은 모두 참선에 장애가 된다. 무념(無念)과 청정(淸淨)으로만이 도에 계합하게 된다. 일체 생각이 없어 고요하되 혼침하지 않고 마음이 깨끗하면 빛이 난다. 이렇게 고요하고(寂) 청정하고(淨) 밝은(明) 마음으로서만이 대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37. 不好勞神커든 何用疎親가
좋지 않고 정신이 피로한데, 어찌 친하고 친하지 않음을 쓰겠는가?
혼침(昏沈)과 반대되는 것은 경안(輕安)이다. 혼침은 몸이 무겁고 정신이 흐린 것이요, 경안은 몸이 가볍고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불호(不好)는 몸이 무거운 것이요, 노신(勞神)은 생각이 어지러워 정신이 피로한 것이다. 친함과 친하지 않음이 있으면, 친한 것은 취하려고 하고 친하지 않은 것은 멀리하여 버리려고 할 것이니 친소(親疎)가 없어야 취하고 버림(取捨)도 없다.
38. 欲趣一乘이어든 勿惡六塵하라
일승으로 나아가려면, 육진경계를 싫어하지 말라.
일불승(一佛乘)은 곧바로 부처 되는 길(佛道)이다. 삼승(三乘)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곧바로 부처되는 길로 나아가려면 좋고 싫음이 없어야 한다. 성문、연각은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제법실상에 어긋나는 것이니 번뇌와 열반이 동전의 양면과 같고, 손바닥、손등과 같아 한 몸(一體)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육진(六塵)을 떠나서 따로 공(空)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육진경계가 곧 공(空)과 한 몸이라, 육진을 싫어하면 공을 등지는 것(背空)이 된다.
39. 六塵不惡하면 還同正覺이라
육진경계를 싫어하지 않으면, 돌아가 정각(正覺)과 같음이라.
육진경계(형상、소리、냄새、맛、감촉、법(受.想.行))의 본성이 곧 참된 진여자성이라 육진을 벗어나서 어디에 진여가 있는가? 이것을 보는 사람은 육진에 대하여 좋고 싫음이 없어서 정각(正覺)에 수순(隨順)하여 나아가 결국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한다. 마치 시냇물이 흐르고 흐르면 결국 큰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다.
40. 智者無爲어늘 愚人自縛이로다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묶이도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됨을 구하지도 않고(不求眞), 거짓을 버리지도 않는다(不捨妄). 참됨과 거짓이 양변이라 모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취할래야 취할 것이 없고, 버릴래야 버릴 것이 없다. 얻을래야 얻을 것이 없고, 잃을래야 잃을 것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공(空)한 가운데 망상으로 분별하여 양변을 나누고 한쪽은 취하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버리려고 한다. 그래서 취하려고 하여도 그것에 묶이고, 버리려고 하여도 그것에 묶인다.
어떤 사람이 함이 없다(無爲), 일이 없다(無事)는 말을 듣고 다시 여기에 집착하여 몸을 꼼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꼼짝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함이 있는 것이고(有爲), 일이 있는 것이다(有事). 함이 없다는 것은 인연따라 필요한 일은 하되, 그것이 공함을 비추어보고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아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목석처럼 되라는 말은 아니다.
41. 法無異法이어늘 妄自愛着하야
법은 별다른 법이 없거늘, 헛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애착할 법이 본래 없음을 보아야 한다. 공하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이 쓸데없는 분별과 집착이 있으니, 참선에 집착하거나 염불에 집착하거나 교학에 집착하거나 깨달음에 집착하거나 ‘어떤 경이 최고다’, ‘어떤 수행법이 최고다’ 온갖 분별과 애착이 있으니 이것은 공(空)을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42. 將心用心하니 豈非大錯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르침이 아니랴.
장심(將心)의 심(心)은 분별망상을 일으킨 허망한 마음이다. 용심(用心)의 심(心)은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에 쓰는 마음이다.
자심(自心)을 곧바로 반조(返照)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에 무심(無心)으로 마음을 쓴다(用心). 일체의 행(行)에 흔적과 자취가 남지 않아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미 분별망상을 일으킨 허망한 마음으로 매사에 마음을 쓰는 것은 크게 그르쳤다는 말이다. 이렇게 마음을 쓰면 상(相)을 취하고 흔적이 남아서 나중에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종이 위에 호랑이를 그려놓고는(相을 취함) 나중에 그 호랑이 그림을 보고 놀라 달아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육진경계에 속지 않고 공함(空)을 보고 허깨비와 같다고 생각하니 相을 취하지 않고 마음에 자취가 남지 않아 아무 기억이 없다.
43. 迷生寂亂이요 悟無好惡어니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나니,
생각이 없으면 고요하고, 생각이 많으면 어지럽다. 미혹한 사람은 일이 없을 때는 생각이 없어서 고요하다가 육진경계를 접촉하면 곧바로 좋아하거나 싫어하여 마음이 요동치고 생각이 어지럽다. 깨달으면 육진경계에 대하여 좋아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기 때문에 고요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다. 여기서 고요함은 어지럽고 시끄러운 것에 대한 상대적인 조용함(일시적인 조용함)을 뜻한다. 깨달으면 본래부터 항상 고요하다는 것(常寂)을 아는 것이다.
44. 一切二邊은 良由斟酌이로다
일체 양변은,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짐작(斟酌)은 헤아리는 것이다. 분별과 같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좋은가?’ 이렇게 헤아리면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양변이 나누어진다. 양변이 나누어지면 한쪽은 좋아하고 다른 한쪽은 싫어하는 증애심이 생기고, 한쪽은 취하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버리려고 하는 취사심이 생기며, 여기에서 온갖 번뇌와 망상이 연달아 발생하는 것이다.
45. 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
꿈、허깨비、허공중의 꽃과 같은 것을, 어찌 애써 붙잡으려 하는가?
금강경에 말씀하기를 “일체유위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와 같고 또한 이슬、번갯불과 같다.”고 설했다. 유위법은 곧 오온이니 이것은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이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몸을 ‘텅 빈 공(空)’이라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을 공으로 보면 ‘몸은 나다’, ‘몸은 내 것이다’라는 그릇된 견해(有身見)와 몸을 아끼는 집착이 사라진다. 일상생활에서 육진경계와 접촉할 때 일어나는 느낌(受)、표상(想)、행위(行)、알음알이(識)도 역시 공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즐거움、괴로움도 공하다고 보고, 과거、미래、현재도 공하다고 보며, 탐진치 번뇌도 공하고, 지혜와 자비와 공덕도 공하다고 보며, 알음알이도 공하고 허깨비와 같다고 본다. 제법실상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눈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칼이 자기 칼을 베지 못하는 것과 같다.
46.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득실(得失)과 시비(是非)를 일시에 놓아버린다. 이렇게 한꺼번에 버릴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 버리려고 해도 버려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얻을 것이 없음을 보아야만 버려진다. 잃을 것이 없음을 보아야만 버려진다. 이렇게 생각한다. “무엇이 있어야 얻을 것이고, 무엇이 있어야 잃을 것인데 한 물건도 없어 텅 비어 공한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
옳고 그름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없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옳았던 것이 그른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른 것이 옳은 것이 될 수도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정된 옳고 그름이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47. 眼若不睡하면 諸夢自除요
눈에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은 스스로 없어지고,
수행을 잘 하여 정신이 맑아지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경지가 있다. 이 때는 졸음도 없고 잠도 없으니 당연히 꿈도 없다. 아함경에는 중야(中夜. 밤10시 ~ 새벽2시)에 눕되 광명을 생각하라(光明想)고 말씀하셨고, 또한 곧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라(恒念起想)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수행하면 눈과 몸은 쉬더라도 정신은 밝아서 깨어있는 것이다. 즉, 잠을 자면서도 수면의 장애(陰蓋)를 제거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48. 心若不異하면 萬法一如니라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만법이 변함없느니라.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첫째 분별이 없고(無有分別), 둘째 싫고 좋은 증애심(憎愛心)이 없으며, 셋째 취하고 버리는 취사심(取捨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이면 마음의 대상인 만법도 역시 달라짐이 없이 항상 그대로 여여(如如)하다.
49.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然하야
변함없는 본체는 현묘하니, 움직임 없이 일체인연을 모두 잊어서,
마음의 본체는 변함이 없어 일여(一如)하나 또한 일체를 다 아는 지혜의 작용이 있으니 이것을 현묘하다고 말한다. 일체의 인연을 모두 잊어버려야만 이 본체를 회복하게 된다.
50. 萬法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만법을 평등하게 관찰하면, 돌아가 다시 자연이니라.
만법을 평등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만법이 본래 일공(一空)이라 차별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귀복(歸復)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이다. 일체인연을 모두 잊고 만법이 평등한 일공을 보면 다시 본연의 마음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51. 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
그 까닭이 없어져서, 견주어 비할 바가 없도다.
까닭(所以)이란 원인(因)이다. 까닭이 없다는 것은 자성청정심이 원인(因)과 조건(緣) 즉, 인연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불가방비(不可方比)는 이 마음이 비유로도 말할 수 없고 표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해심밀경에서 승의제(勝義諦)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이요, 절제표시(絕諸表示)라 한 뜻과 같다.
52. 止動無動이라 動止無止니
움직임 가운데 그침을 보니 움직임이 없고, 그침 가운데 움직임을 보니 그침도 없나니,
움직임과 그침은 양변으로서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그침이 있으며, 그침이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다.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임이 없는 그침을 통찰하면 움직임이 더이상 없다. 그침 가운도 움직임을 통찰하면 그침이 더이상 없다. 즉 움직임을 보건 또는 그침을 보건 간에 움직임과 그침이 하나의 공(一空)의 양면이라는 것을 통찰하면 더이상 움직임도 없고 그침도 없는 것이다.
마치 시계추가 왼쪽으로 갈 때 오른쪽으로 잡아당기면 중간에 그쳐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시계추가 오른쪽으로 향할 때 왼쪽으로 잡아당기면 중간에 그쳐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움직임을 볼 때 그 이면의 그침을 꿰뚫어 보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침을 볼 때 그 이면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면 또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경계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일여(一如)가 되는 것이다.
53.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나니,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움직임이 그침과 한 몸이라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꿰뚫어 보면 더 이상 둘이 없다. 둘이 없으면 하나도 없다. 더 이상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54. 究竟窮極하야 不存軌則이요
끝까지 추구하면, 일정한 법칙이 없음이니,
일체법은 상대적인 것이고 결정적인 법칙이 없다. 무상、고、무아를 삼법인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완전히 무상하다면 업과 과보의 법칙도 파괴될 것이다. 만약 완전히 고라면 그 고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무아라면 열반도 단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은 항상하다는 전도망상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설한 것뿐이요, 고는 즐겁다는 전도망상을 대치하기 위해 설한 것뿐이요, 무아는 오온에 대하여 ‘나’라는 전도망상을 대치하기 위하여 설한 것뿐이요, 공은 오온에 대하여 ‘내 것’이라는 전도망상을 대치하기 위하여 설한 것뿐이다. 일정한 법칙이 없기 때문에 진여의 대용(大用)으로서 걸림없이 자유자재하게 법을 쓰는 것이다.
55. 契心平等해야 所作俱息이로다
마음이 평등에 계합하면, 지음과 짓는 자가 함께 쉼이로다.
마음이 평등하여 차별심이 없으면 짓는다는 것도 볼 수 없고, 짓는 자도 볼 수 없다. 움직임이 곧 그침이요, 유위가 곧 무위이기 때문이다.
56. 狐意淨盡하면 正信調直이라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청정하면, 바른 믿음이 적절하게 바르게 되며,
여우같은 의심은 일체법이 곧 하나의 공(空)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하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이름(名)과 모양(相)과 말과 문자를 따지고 헤아리고 분별하면서 도를 찾고 부처를 찾는다. 대신심(大信心)이 확고하게 서면 더이상 의심이 없고 해행일치(解行一致)하여 곧바로 길을 걸어가 무상대도를 증득(證)한다.
57. 一切不留하야 無可記憶이로다
일체에 머물지 않아서, 기억할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일체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능(能.주관.마음), 소(所.境.六塵.객관.대상)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머물지 않기 때문에 행주좌와어묵동정에서 육진경계의 상(相)을 취하지 않고, 상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흔적과 자취가 없어서 기억이 전혀 없다.
58. 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이라
마음광명이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니, 마음으로 힘쓸 필요가 없음이로다.
허(虛)는 마음자리가 공적(空寂)한 뜻이고, 명(明)은 반야지혜의 광명이다. 지혜광명이 스스로 비추기 때문에 무위(無爲)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유위(有爲)의 노력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59. 非思量處라 識情難測이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며, 알음알이로는 측량하기 어렵도다.
대도는 온몸으로 체험하고 깨닫는 것이지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진여자성은 일체 이름(名)과 모양(相)과 말(言)과 생각(念)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60. 眞如法界엔 無他無自라
진여법계에는, 남도 없고 자신도 없음이라,
진여법계에는 나와 남이 없어서 무연(無緣)의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저절로 나타난다.
61. 要急相應하면 唯言不二로다
빨리 상응하고자 하면, 오직 ‘둘 아님’을 말할 뿐이라.
간단히 말하면 ‘둘 아님’이라 말하는데, 이 불이(不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일공(一空)이다.
62. 不二皆同하야 無不包容하니
둘 아님은 모두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불이는 둘로 나누기 전의 하나이니 양변 전체와 같은 것이며 또한 삼라만상을 포함한다고 앞에서 이미 설했다. 이것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성품이고, 대립이 없어 포용하지 않음이 없이 일체를 포괄한 것이다. 또한 다툼이 없는 것(無諍)이다.
양변(兩邊) : 차별(差別). 대립(對立). 불통(不通). 장애(障礙). 투쟁(鬪爭).
불이(不二) : 평등(平等). 포용(包容). 소통(疏通). 무애(無礙). 무쟁(無諍).
63. 十方智者가 皆入此宗이라
시방세계의 지혜로운 이들이, 모두 이 종(宗)에 들어오느니라.
산에 오를 때 처음 오르는 길은 각각 다르지만 정상에 이르면 하나가 되듯이 시방세계의 보살들이 각각 다른 방편으로 도를 닦더라도 결국에 이르는 곳은 하나로 통한다. 여기서 종(宗)은 진여법계다.
64. 宗非促延이니 一念萬年이요
종(宗)은 짧은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라,
진여법계는 짧고(促) 긴 것(延)이 없어서, 짧은 것이 곧 긴 것이고 긴 것이 곧 짧은 것이다. 양변이 하나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고로 일념이 만년이고 만년이 일념이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이 곧 일념이며, 일념이 곧 무량겁이다.”라고 설했다.
65. 無在不在하야 十方目前이로다
있음도 아니고 있지 않음도 아니어서, 시방세계가 목전이로다.
진여법계는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시방세계의 먼 곳이 곧 목전이고 목전이 곧 시방세계의 먼 곳이다. 양변이 하나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佛眼)으로 화장찰해(華藏刹海)의 갠지스강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불국토를 목전에 있는 것처럼 본다.
66. 極小同大하야 忘絶境界하고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 크고 작은 경계가 잊혀지고 끊어지며,
진여법계는 작고 큰 것이 없어서, 작은 것이 곧 큰 것이고 큰 것이 곧 작은 것이다. 양변이 하나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티끌도 역시 이와 같다.”라고 설했다.
그러므로 경에서 설하기를 ‘대보살이 한 털구멍속에 삼천대천세계를 넣기도 하고, 삼천대천세계를 멀리 타방국토에 던져버릴 수도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천대천세계 가운데의 중생들은 손상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67. 極大同小하야 不見邊表라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 가장자리와 겉을 볼 수 없노라.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으니 경에서 설하기를 ‘삼천대천세계를 들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고 설했다.
68. 有卽是無요 無卽是有니
있음은 곧 이것이 없음이요, 없음은 곧 이것이 있음이니,
진여법계는 또한 유와 무의 양변이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도 통하는 말이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는 극미(極微)를 칠분(七分)하면 인허진(鄰虛塵 허공과 근접한 미진)이 되고, 이것이 색변제상(色邊際相)이며 다시 이 인허진(鄰虛塵)을 쪼개면 허공(虛空. 眞空)이 되고 이 허공이 색상(色相)을 출생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여래장(如來藏) 가운데 물질의 성품이 곧 진공이고(性色眞空) 또한 진공의 성품이 곧 물질인(性眞空色) 청정한 본연성품이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清淨本然周遍法界), 중생의 마음을 따라 그 양을 알며(隨衆生心應所知量), 업을 따라 발현(循業發現)한다고 설하고 있다.
69. 若不如此인댄 不必須守니라.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느니라.
이와 같은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 법은 다 불요의(不了義)로서 방편가설(方便假說)일뿐이고 요의(了義)가 아니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70. 一卽一切요 一切卽一이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진여법계는 하나와 여럿, 부분과 전체도 양변으로서 하나로 소통하는지라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이며,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이다. 법성게에서는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이라고 설했다.
71. 但能如是하면 何慮不畢가
오직 능히 이와 같다면, 어찌 끝내지 못할까 염려하랴?
일법계를 통달했다면 어찌 번뇌를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겠는가? 견성(見性)했더라도 아직 번뇌의 남은 습기가 있으나 보림(保任)으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
72. 信心不二요 不二信心이니
믿는 마음은 둘 아님이요, 둘 아님은 믿는 마음이니,
신심(信心)은 인(因)이요, 불이(不二)는 과(果)이다. 그러나 인과 과도 역시 양변이라 서로 통하는 것이니, 인이 곧 과요 과가 곧 인이다. 그러므로 진여자성을 확고하게 믿는 마음이 곧 불이의 진여요, 불이의 진여가 곧 믿는 믿는 마음이다.
73. 言語道斷하야 非去來今이로다.
말길이 끊어져서, 과거、미래、현재가 아님이로다.
이 도리는 말길이 끊어진 것이라 말로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라서 삼세(三世、시간)과 시방(十方、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stud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역 특강 3) [주역]과 선진유학의 마음론 (0) | 2021.06.09 |
---|---|
[인문학 고전콘서트] 윤홍식의 심경 강의 1강 (0) | 2021.06.04 |
NO.43 澤天夬 (0) | 2021.05.28 |
宮商角치羽 (0) | 2021.05.18 |
[한자 이야기]<770>其言之不怍이면 則爲之也가 難하니라 (0) | 2021.05.02 |